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은 대한민국이 군사정권아래 있던1960년대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우리네 자매의 어린시절에 다른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선물해 줄수 있었던 이유인것 같다
예술가들의 사랑은 보통사람들과의 사랑과는 좀 다르다.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고 싶어하는 이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사랑한다.
그리고 시대와 사회를 너머선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에 예술가들의 자녀들이 동시대의 사람들과 완전히 다를 세상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가들 자체가 이 세상에 속해서 살 수 없는 머리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군사정부가 시회를 지배했던 그 당시 딸만 넷이었던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 사회가 국민들에게 요구했던 "시민정신" 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교육했던 것이 아니고 진정한 사랑과 가치 그리고 진정한 인간의 자유 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기 위해 몸부림 치시며 사셨다.
어머니는 어떤 어린시절을 보내셨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어머니는 자신의 과거나 어린시절에 대해 절대로 말하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이북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셨고 전쟁때 남한으로 오신 것으로 알고있다.
서울에서 이화여자대학교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시고 오랬동안 고등학교 선생님 교직에 계시다가 너무 몸이 약하셔서 집에서 동내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시는 일을 하셨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우리가 잘 모르는 아픈 과거가 있었고 이것으로 인해 어머니는 평생 신경쇠약 증세와 우울증 그리고 감정의 심한 기폭을 나타내셨다.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이불에 누워 계셨던 날들이 많았고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해서 40킬로가 넘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던 분이시다.
하지만 이렇게 슬픈 얼굴을 하셨던 어머니가 활짝 웃으시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여인보다도 아름다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재미있고 신기한 우리나라의 옜 양반들의 전통과 집의 구조등에대해 많은 말씀을 해 주셨었다.
어머니를 활짝 웃을 수 있게 만들수 있는 것은 꽃이었다.
항상 어머니는 밥먹는것 보다 꽃 보는 것이 훨씬 좋다고 우리에게 말씀 하시곤 했다.
아버지 조영동 화백이 그린 모든 구상의 꽃 작품은 어머니를 위해서 그린 것이다.
항상 우울증을 많이 가지고 계셨던 어머니에게 꽃을 그려 선물해 마루와 안방에 걸어두셨다.
거의 대부분의 꽃그림은 어머니가 팔아서 돈으로 쓰셨지만 이렇게 우리 유족에게 남은 꽃그림들이 아직도 있다.
이 그림은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꽃 중에 하나 10월의 국화 그림이다.
아버지가 이그림을 그리실 때가 기억난다.
추석이 지나고 아버지는 이 꽃을 그리기 시작하셨다.
어머니가 이 꽃을 보면서 또 감탄하고 또 감탄하시며 기뻐 하셨던 것도 생각난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많은 개인들에게 지울수 없는 트라우마를 안겨주었지만 이것을 극복하고 사랑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예술가들이 진정한 시대의 영웅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었던 고문들과 최류탄 시위 그리고 인권말살과 자유 탄압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랑하는 가치들을 위해 매일매일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예술 작업을 하신 나의 아버지는 그래서 나의 영웅이다.
그 어떤 민주열사들 보다도 우리 네 자매들에게 자유의 의미와 진정한 사랑의 의미 그리고 인간존중의 의미를 가르쳐 주신 예술가이다.
10월 국화를 보면서 다시한번 그날의 아프고 아름다왔던 대한민국에서의 추억에 빠진다.
조영동 화백의 더 많은 이야기:
https://blog.naver.com/newspainpa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