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봄은 너무나 변덕스럽다.
잠깐 바람이 그치고 이제는 겨울이 끝난 것 같다가도 다시 갑자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 덮고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기도 하고 또 눈까지 내리는 3월도 있다.
워낙에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내복을 3겹 4겹 입고 양말도 두 세개를 신고 다녀야 했다.
하지만 나의 다락방은 아주 따듯했다.
가장 꼭대기 층에 있어서 집안의 온기가 모두 올라왔고 옜날에 설치해 놓았던 커다란 히터가 방의 구석에 있어서 나의 방으로 들어가면 이렇게 겹겹이 입은 옷을 벗고 반팔로 있을 수 있을 정도였다.
따듯한 다락방에 앉아서 하루 종일 책을 읽으며 창을 보고 있으면 이 공간 만큼은 그때의 나의 집이 되었다.
어머니의 목소리도 그립고 아버지의 캔버스 물감 향기도 그리웠다.
전화기도 없어서 전화를 마음것 할 수 있던 시기도 아니였고 우체국에 가서 엄청난 돈을 내고 전화를 하던지 하숙하고 있던 집에서 전화를 하고 나중에 청구서에서 국제 통화료를 내가 부담했던 식으로 전화를 했지만 너무 가격이 비싸서 일주일에 딱 한번 5분 정도 " 엄마, 아빠, 나 잘 있으니깐 걱정 마세요" 정도의 통화만 하고 거의 이틀에 한번씩 편지를 써서 보냈다.
비자가 해결된날 나는 부모님께 긴 편지를 썼고 그날 저녘 홀거와 약속한 베트남 식당으로 가기 위해 다시 옷을 잔뜩 끼워 입었다.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홀거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기찻길 하나 건너면 되니깐 걸어서 같이 가자"
나는 홀거와 함께 이미 어둑어둑해 지고 있는 기찻길을 걸어 맞은편에 새로생긴 베트남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옜날 동독에 위치해 있던 이 도시에는 이렇게 동양인이 하는 음식점들이 없었다.
처음으로 생긴 이 베트남 음식점에는 많은 사람들이 반은 호기심에 이 식당을 방문한 것 같았다.
밝은 노란 조명과 동양 전통 문향과 그림들이 그려져 있던 식당으로 들어오자 한국의 분위기는 아니지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홀거가 식당 주인의 안내를 받아 둥그런 식탁 앞에 앉았고 베트남 식당 종업원이 나의 얼굴을 보면서 베트남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독어로
" Ich bin Koreanerin (저는 한국 여자 입니다.) "
라고 말하자 이 종업원은 이상한 얼굴로 나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족들에게로 가서 나를 보며 베트남 말로 뭐라고 속닥 거렸다.
홀거는 나와 마주 앉아 메뉴판을 보면서 어떤 요기가 가장 좋은지 말해 달라고 했다.
나는 돈이 정말 없는 학생이었지만 이 식당의 가격은 저렴했다.
그 당시 요리 한 접시를 5 마르크 약 2,5유로 5000원 정도에 먹을 수 있는 식당이었다.
하지만 그당시 대한민국에서 아르바이트 학생이 받던 돈은 한시간에 급여 1500원, 그리고 김밥 한 줄에 1000원 하던 시절 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이 식당은 저렴한 식당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양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또 홀거와 도일어로 대화 하면서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해 보고 싶어 식당에 같이 온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간장, 굴소스가 무엇인지 참기름은 어떤 향이 나는지... 등을 설명해 주면서 같이 베트남 요리 (사실 중국 요리와 비슷한 동양 요리집 이었다) 를 주문했고 홀거는 너무나 신기해 하면서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일찍부터 돈을 버는 일에 뛰어든 이 아이는 나보다 2살이 더 많은 착한 막내 아들로 전형적인 독일남자 아이들, 부지런하고 독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며 정직하고 순수한 젊은이였다.
그리고 갑자기 들어오기 시작하는 먼먼 동양의 문화들에 대해 신기하고 어색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 공부를 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나의 질문에 홀거가 말했다.
" 공부 하면 뭐해. 돈이 많은 게 최고야. 조금 더 돈을 많이 벌면 조수도 한명 채용해서 더 많은 일을 하고 더 돈을 많이 벌을 거야. 차도 더 큰 것을 사고... 하지만 내가 돈을 많이 벌면 꼭사고 싶은것은 배야. 배를 타고 세계를 여행하는 게 나의 꿈이야"
어린시절을 공산국가체제 ( 동독지역) 에서 보낸 이 아이는 독일이 통일 되면서 돈으로 모든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닳은 것 같았다.
마치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자신의 최고의 목표인 것처럼 말하는 이 아이를 보면서 이 세상 어디에서도 진정한 공산주의는 실현되지 못했음을 다시 느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는 식사비를 딱 반씩 나누어 냈다.
식당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고 하는데 식당 주인이 더듬거리는 독일말로
어디에 살며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이곳의 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이고 바로 기찻길 건너에 홀거의 집에 하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식당주인은 뭔가 자신의 가족들과 다시 베트남어로 이야기를 주고 받더니 나에게 혹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면 자신에게 말하고 주말에 식당에서 일 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나는 너무 좋았다.
주말에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또 많은 사람들을 알수 있는 기회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요일은 교회에 나가고 싶었다.
독일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공산 체제 안에서 버틴 크리스챤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주인에게 일요일 오전 예배가 있는 시간만 빼어 놓고는 식당에 나와 일 할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식당을 나왔다.
홀거는 오자마자 일자리를 찾은 나를 마치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철도길을 따라 걸어 다시 나의 따듯한 다락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홀거의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했을때 홀거가 말했다.
" 추우면 내 방에와서 내 침대에서 같이 자"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너네 집에서 너네 다락방이 아마 제일 따듯할거야. 오늘 정말 덕분에 많은 것 배우고 일자리도 얻었어. 고마워."
" 그래도 추우면 내 방에와, 나 지금 여자친구 없어"
내가 다시 대답했다.
" 안추워. 잘자."
독일의 젊은이들은 직선으로 질문하고 직선으로 대답한다.
처음엔 좀 어렵지만 이렇게 직접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방식은 많은 오해를 줄이고 시간을 절약한다.
물론 낭만이나 로맨스는 정말 없지만 이렇게 직선의 대화는 남녀관계에서도 적용된다.
" 나랑잘래?" "아니" " 그래 안녕"
이게 가능한 나라가 바로 독일이고 이런 독일이 나는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