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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진 Jul 16. 2024

9.너는 내게 올 수 없지만

케테 콜비츠의 판화 <부모>

“애 너무 닦달하지 마. 모녀 사이만 나빠지는 거야. 지나고 보면 다 부질없어. 그저 잘 먹고 잘 자주면 감사한 거야.”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는데도 허구헌 날 누워 있기를 좋아하는 딸내미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나에게 '꽃순이 언니'는 세상 착한 얼굴을 하고 다독여준다. 

그날 아침도 몇 번이나 일어나라고 실랑이를 벌였고, 그놈의 잠 때문에 하마터면 지각할 뻔했다. 자칫 지각이라도 해서 내신 성적에 흠집을 낼까 봐, 곡예 운전을 하며 아이를 간신히 등교시키고 온 터였다.

“언니야! 모르면 말을 마셔. 누워 있는 거 볼 때마다 얼마나 속이 뒤집어지는데, 그렇게 빈둥댈 거면 차라리 그  시간을  나한테 주지. 에휴, 속상해!"

‘꽃순이’라는 별명처럼 꽃을 좋아한 언니는 문화센터 꽃꽂이 클래스에서 만나 가끔 밥도 먹고 차도 마시는 편한 사이였다. 하지만 한껏 부아가 치민 나는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언니가 야속했다. 더욱이 자기 일이 아니어서 편하게 말하나 싶은 생각에 태평양만큼 관대한 언니의 마음씀에 살짝 섭섭하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의 일이다. 출석 모범생인 언니가 꽃꽂이 수업에 결석을 했다. ‘꽃을 좋아하는 언니가 뭔 일이래’, ‘어디가 아픈 건 아닌가?’ 걱정이 만발하고 있는데, 함께 수업을 듣는 언니의  친구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뜻밖의 사연에 가슴이 미어졌다. 


5년 전의 일이었다. 스무 살인 언니의 딸은 미술대학에 다니는 예비화가였다. 부모에게 학비 외에 부담을 주는 게 미안했던 딸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겨우 작업실을 마련했다. 모아둔 돈이 넉넉지 않아서, 지하 공간에 이젤을 세울 수 있었다. 

유례없는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언니 딸은 그날도 지하 작업실에서 캔버스와 씨름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작업실에 물이 들어오는 것도 몰랐다. 바닥이 축축하더니, 어느새 무릎까지 차올랐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다급해진 딸은 꽃순이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언니는 옷을 입는 둥 마는 둥 남편을 깨워 작업실로 내달렸다. 

폭우는 그치지 않았고, 건물 밖에 있어야 할 딸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에게 전화할 시간에 재빨리 작업실에서 뛰쳐나왔어야 했는데, 딸은 지하에 갇히고 말았다. 작업실은 이미 물에 잠겨 있었다. 곁에는 부모 대신 자신이 좋아하던 그림들만 떠 다녔다. 

스무 해 곱게 키운 딸이었다. 언니는 황망하게 딸을 보냈다. 꽃꽂이 수업에 빠진 날은 납골당에 두었던 딸의 유골을 선산에 뿌린 때였다. 엄마로서 언니가 한 결정이었다. 공부만 하다 간 딸이 유리함 속에서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서, 민들레 홀씨처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고 한다.


케테 콜비츠와 꽃순이 언니의 '참척'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테틀 미술관에서였다.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1867~1945)의 판화에서 돌연 꽃순이 언니를 만났다. 판화 <부모(Die Eltern)>에는 놀랍게도 언니 부부의 모습이 시커멓게 각인되어 있었다. 부부의 모습이 너무나 비통했다. 판화를 보는 순간, 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부부로 보이는 두 남녀가 서로 안고 있다. ‘안고 있다’라기보다는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듯하다. 남편은 거칠고 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오열하고 있다. 마디 마디 굵은 손가락은 남편의 절망과 고통을 보여주는 또 다른 얼굴이자 마음 같았다. 다른 한 손은 아들의 사망 소식에 고꾸라진 부인을 부축하고 있었다. 부부는 서로에게 기댄 채 울부짖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곡소리가 가슴에 파고들었다. 목판화의 거칠고 강한 선이 아들을 잃고 오열하는 부모의 절망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케테 콜비츠는 1차 대전에서 아들을 잃었다. 막내아들인 페터는 18살의 나이에 몹쓸 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전한다. 부모의 만류에도 “엄마는 저를 비겁하게 키우시지 않았잖아요. 꼭 돌아올게요.!"라며 현관문을 나섰다. 케테는 오매불망 아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하지만 두 달도 안 되어 그녀는 한통의 통지서를 받는다. ‘당신의 아들이 전사했습니다.’ 그뿐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케테는 이날부터 늙기 시작했고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러나 그녀는 죽을 날만 기다리지 않았다. 반전 작품인 7점 연작 목판화 <전쟁(Krieg)>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연작 중 세 번째 판화인 <부모>를 통해 전쟁의 참상을 세상에 알렸다.  아들의 전사 소식에 서로 부둥켜안고 울부짖고 있는 케테와 남편 카를의 모습은 전쟁으로 참척(慘慽: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 당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전하는 공감과  반전의 메시지가 되었다. 그녀는 숨이 다하는 날까지 세상의 모든 ‘페터’를 지키기 위한 반전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케테 콜비츠 <부모>  1921~1922 .목판화. 40x47cm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

꽃순이 언니는 그날 이후로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대신 제법 큰 꽃가게에 취직했다. 꽃을 판매하고 화분을 나르는 등 고된 일이었지만 언니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고 했다. 아르바이트로 돈이 모아지면, 꽃순이 언니는 짐을 꾸려 계획 없이 훌쩍 여행을 떠났다. 그렇게 산토리니도 다녀오고, 피렌체에도 들렀다. 돈이 떨어지면, 다시 꽃가게에서 화분을 날랐다.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은 자식을 먼저 보내는 일일 것이다. 이제는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이름을  불러도 오지 않는 아이. 아이가 처음 엄마를 불러주었을 때의 설렘, 비릿하고 달큼한 아이의 살 냄새, 안았을 때 느껴지는 가슴 벅찬 아이의 몸, 쌔근쌔근 잠들었을 때의  천사 같은 모습, 우유냄새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살이 뽀얗게 오른  발바닥, 토라지면 실룩샐룩했던  빠알간 입술,  '엄지 척' 하며 즐겨 먹던 음식들, 처음 앞니를 빼던 날, 뒤에서 밀어주지 않아도 혼자 자전거를 타던 날… 삐죽삐죽 새어 나는 아이와의 추억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것이 때로는 비수가 되어 숨통을 끊을 듯 가슴 아프게 하겠지만, 엄마가 힘들어하면 더 아파할 아이이기에 그리움과 애잔함을 애써 꾹꾹 눌러 담았을 케테 콜비츠와 꽃순이 언니. 아이는 올 수 없지만 언젠가 아이에게 가기 위해 더욱 잘 살아보겠다는 ‘부모의 다부진 음성’이 판화에 진하게 새겨져 있다. 


'그냥 엉덩이만 두드려줘!' 

그날 꽃순이 언니가 다독여준 말이 새삼 큰 울림으로 남았다. 언니의 말은 그냥 한 위로가 아니었다. 참척을 겪은 엄마의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언니는 이렇게 덧붙였다. 

“애가 네 맘에 안 차더라도 너 잘한다고 그냥 엉덩이만 두드려줘.”





<함께 듣는 곡>

Bach - Sonata for violin and harpsichord no. 5 in F minor BWV 1018 


바흐가 독일 쾨텐에서 살던 시절, 공작을 모시고 두 달 동안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공작의 여름 휴양은 낮엔 사냥과 온천, 밤에는 만찬과 음악회를 즐기는 것이었는데, 바흐는 매일 밤 대공의 손님들을 위해 공연을 해야 했지요. 


5월에 떠나서 7월이 되어 드디어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출장을 떠날 때 웃으며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 주던 아내 바르바라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르바라는 남편이 집에 없는 사이에, 갑자기 병을 앓게 되었고 장례까지 치른 후였습니다. 이보다 더한 청천벽력이 있을까요. 더군다나 그 빈자리에 어린 네 아이만 남아 있었습니다(둘 사이에 7명의 자식이 생겼지만, 그중 3명은 일찍 사망했습니다). 한참 엄마가 필요한 아이들은 5살부터 11살까지 어리디 어렸습니다. 아이들은 종일 엄마를 부르며 울다 지쳐 잠들었습니다. 유난히 금슬이 좋았던 결혼 13년 동안, 아내는 소중한 인생의 동반자였습니다. 


이 시기에 만든 곡 중에 무반주 파르티타나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6곡의 소나타 등이 있습니다. 특히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 BWV1014~1019는 아내를 잃은 바흐의 비통함이 담겨있습니다.

작가 최정동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이 여섯 곡이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의 죽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추측했다. 쾨텐 시절에 작곡된 데다 바흐의 음악으로는 이례적으로 통렬한 슬픔을 품고 있는 곡들이 많기 때문이다. 1번 1악장과 5번 1악장의 비통함은 듣는 사람을 눈물짓게 한다. 나는 이 곡을 들으면 어두운 방구석에서 소리 죽여 곡(哭)을 하는 중년의 사내가 떠오른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아이들의 눈을 피해 홀로 흐느끼는 처참한 모습." 


아이들을 재운 후, 캄캄한  방구석에서 웅크린 바흐. 행여 자신의 흐느낌 소리에 아이들이 깰까 봐,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하고 속울음을 삼키는 중년의 남자가 떠오릅니다. 아들을 먼저 보내고 비탄에 빠진 콜비츠 부부의 울음소리도 오버랩됩니다. 바이올린의 선율은 울다 지쳐 목이 쉰 이들 부부의 애틋한 마음입니다.


https://youtu.be/tZvMaawWXzM?si=6xI90pk1mvckO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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