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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진 May 15. 2024

6. 작가의 '봄꿈'

김준권 <산에서 1303>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

"…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ㅡ영화 《달콤한 인생》 중 김선우(이병헌 분)의 나레이션    


      

’ 청춘‘은 이미 ’ 젊음‘과 먼 거리를 두었을 때 꺼내보는 단어이다. 지나고 보니 ’ 청춘‘이었다.

그 시절엔 지금이 가장 푸르른지 몰랐다. 기고만장한 ’ 젊음‘, 그거 하나 믿고 이루지 못할 꿈을 꾸었다.

자유의 꿈, 민주화의 꿈을..

“숨죽여 흐느끼며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꿈꾸었다. 세상에 대한 애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보기 위해 눈앞의 부조리에 침묵하지 않았다. 그것은 시대의 소명이기도 하고, 우리 세대의 과제인 듯했다. 

'라떼(나때)'는 그랬었다. 

    


'길'에서 '산'으로

목판화가인 김준권(1957~  )의 <산에서 1303>(채묵목판 160x84cm)에는 그가 살아온 ‘청춘’의 행로가 아로새겨져 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재학시절, 극사실로 그리는 하이퍼리얼리즘에 몰두했던 작가는 5•18 광주민주항쟁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나는 무엇을 했나?’ 용기 없이 뒷전에 서 있기만 했던 자신을 돌아본다. 부패한 군부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이 꼭 죄인인 된 것만 같았다.  

   

젊은 작가는 유화용 붓을 놓고 거리로 나간다. 길 위에 선 그는 캔버스 대신 판화로 갈아탄다. 그리고 판화로 제작한 ‘걸개그림’으로 민주화를 향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작품은 곧 시대의 절규이자 자기 내면의 소리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달콤한 꿈'을 향해 질주한다. 1987년 6월 항쟁, 1991년 명지대 강경대 치사사건을 거치며 민중미술 운동에 헌신했다.

그리고 교사로서, 미술교육운동과 전교조 활동을 하며 잘못된 사회에 저항했던 작가는 90년대 이후 사회운동의 힘이 빠지자, ‘길’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대기를 호흡한다. 곧 산에서 마주한 싱그러운 풍경을 목판 위에 새긴다. 그것은 “산과 들, 바다, 나무, 꽃들 모두 사생과 사색의 기록들이자 가슴으로 되새김질해 그리고 새기고 찍은 풍경들”이었으며,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작가 특유의 산수 연작이 태어난다. 우리 국토를 새긴 산수 연작도 사실적인 풍경 목판화에서 풍경을 단순화한 목판화로 확장하며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깊이 품는다.   


  

김준권(1957~  ). <산에서 1303>  채묵목판 160x84cm



'산에서'  묻는 작가의 꿈

40여 개의 목판을 겹겹이 찍어 완성한 <산에서 1303>은 '수성채묵목판화'이다. 수성채묵목판이란 여러 장의 판을 제작해서 찍을 때, 기름을 사용하여 종이에 물감이 얹히는 유성 기법('유성채묵목판')과 달리, 물을 사용하여 종이에 물감이 스미게 하는 수성 기법의 목판화를 말한다. 이 작품은 작가의 꿈의 결실이다.   

  

작품 전체에 빼곡히 산이 들어서 있다. 무지갯빛처럼 각각 다른 색을 띠는 산들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등성 켜켜이 젊은 시절 가졌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자유를 향한 소망과 실천이 이 산수풍경에서 한데 녹여져 찬연하게 빛나는 것만 같다.      


옛 선비들이 산수도에 그들의 이상향을 묘사했듯이 작가도 작품 하단에 그만의 이상향을 새겨놓았다. 유유히 흐르는 강, 우거진 나무들, 그곳엔 야만도 폭력도 착취도 찾아볼 수 없다. 지극히 평화롭다. 마치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린 <몽유도원도>를 보는 듯하다.


작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자유가 충만한 민주화였을까? 작가로서의 명예였을까? 아니면 아직 밟지 못한, 그래서 목판으로 새기지 못한 북녘땅일까?

작가는 자신의 '달콤한 꿈'을 어느 정도 이루었을까? 혹 이루지 못한 꿈을 안고 지금도 속울음을 삼키며 목판을 새기는 건 아닐까?  

작가의 꿈처럼 작품의 산세가 고요히 약동한다.     





<함께 듣는 곡>     

Frülingstraum(봄꿈) , Winterreise No.11 – F.Schubert


슈베르트는 베토벤이 사망한 해인 1827년, 총 24곡으로 이루어진 <겨울 나그네(Winterreise)>를 작곡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겨울나그네'로 번역되었지만 독일어 'Reise'는 여행, 방랑 등을 뜻하고, 영어권에서도 'Winter Journey'로 표기하고 있지요.     


이 ‘겨울 나그네’는 빌헬름 뮐러(Wilhelm Müller, 1794~1827)라는 시인의 연작시에  ‘청년’ 슈베르트가 곡을 입힌 것입니다.

시인 뮐러는 루이제 헨젤이라는 여인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루이제는 작곡가 멘델스존의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의 남편, 그러니까 멘델스존의 매형인 빌헬름 헨젤의 여동생이기도 합니다.) 그녀 또한 시인이었지요. 그러나 뮐러가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하기도 전에 루이제는 그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상심한 뮐러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납니다. 아픔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실연의 고통으로 돌아갈 본향이 없어진 청년의 이야기로 거듭났습니다.     


<겨울 나그네>의 1부는 차가운 현실에 고통받는 청년의 아픔, 그리고 2부는 자아를 상실하고 미쳐가는 이야기입니다. 그중에 다섯 번째 곡인 '보리수'가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가슴 시리게 아린 곡은 열한 번째 곡인 '봄의 꿈(Frühlingstraum)'입니다. 

        

11.Frühlingstraum        

Ich träumte von bunten Blumen,          

So wie sie wohl blühen im Mai;             

Ich traeumte von grünen Wiesen,

Von lustigem Vogelgeschrei.     

Und als die Hähne krähten,

Da ward mein Auge wach;

Da war es kalt und finster,

Es schrien die Raben vom Dach.     

Doch an den Fensterscheiben,

Wer malte die Blätter da?

Ihr lacht wohl ueber den Träumer,

Der Blumen im Winter sah?     

Ich traeumte von Lieb' und Liebe,

Von einer schönen Maid,

Von Herzen und von Küssen,

Von Wonne und Seligkeit.     

Und als die Haehne kräten,

Da ward mein Herze wach;

Nun sitz ich hier alleine

Und denke den Traume nach.     

Die Augen schliess' ich wieder,

Noch schlägt das Herz so warm.

Wann grünt ihr Blätter am Fenster?

Wann halt' ich mein Liebchen im Arm?          

봄의 꿈     

꿈을 꾸었지.

5월에 활짝 피는 싱그러운 꽃을

꿈을 꾸었어,

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푸른 들의 꿈을.     

그리고, 새벽닭의 울 때에

난 눈을 떴지.

주위는 춥고 어두웠으며

지붕에서는 까마귀가 울고 있었지.     

저 창문 유리에

누가 나뭇잎을  그려놓았을까?

꿈꾸었던 나를 비웃고 있을까?

한겨울에 꽃을 보았다는 사람을.     

난 꿈을 꾸었지.

아름다운 소녀와의 사랑의 꿈을

뜨거운 포옹과 입맞춤,

기쁨과 행복의 꿈을.     

그리고 새벽 수탉이 다시 울 때,

내 마음도 깨어났지.

이제 난 여기 홀로 앉아

내 꿈을 되새겨 보네.     

두 눈을 감아본다.

내 심장은 아직도 따뜻하게 뛰고 있네.

꽃은 언제 다시 피려나?

그녀를 언제 다시 안아보려나?     

          

'꿈을 꾸었다.

따뜻한 봄. 사랑했던 그녀도 꿈속에선 웃고 있다.

달콤한 꿈을 꾸고 몸은 깨어났지만 마음은 아직 따뜻하기만 한 봄.’   

  

현실은 혹독한 겨울이지만 마음은 아직 꿈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얼마나 아쉬웠을까요. 게다가 차갑기만 한 현실은 또 얼마나 서러웠을까요.

평생 지독한 가난과 병에 시달렸던 슈베르트는 어떠한 ‘봄꿈’을 꾸었을까요. 그가 소망했던 미래는 무엇이었을까요.

200년 후, 그의 노래는 혹한의 세월에 ‘겨울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며 ‘봄의 꿈’을 꾸는 젊은이들에게 삶의 노래가 되었습니다.     


https://youtu.be/igBBHaKfszk?si=LlyAIL2sm0SJb8a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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