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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이랑 Dec 21. 2021

아버지의 기도

누군가 널 위하여 기도하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늦은 저녁 아버지께 연락이 왔다. 아버지께서도 3차 접종을 맞으셨는데 나는 어떤지 걱정이 되셨던 것 같다. 어머니께 연락을 드려서 같이 계시기에 연락을 안 드렸더니 아내에게 연락을 하셨다. 아내는 피곤했는지 일찍 잠들어서 내가 연락을 받았다.


 3차 접종에 대한 안부를 들으시고 이사한지도 되었는데 인근에 교회를 다닐 곳은 알아보았는지 물으셨다.

 “요즘에 코로나 영향으로 사람 많은 곳은 위험해요.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그때 알아보려고요.”

 “교회들이 방역이 얼마나 철저한데 소독도 하고 체온이 높으면 입장도 안 시키는걸.”


 요즘 교회에서 코로나 방역 관리도 하고 계신 아버지께서는 나를 안심시키며 전도를 하고자 하셨다. 예전에는 월간 QT를 집으로 보내주셔서 보지도 않은 QT책들이 쌓이기도 해서 이제 그만 보내시도록 했다. 이사 오기 전에 아내와 함께 인근 교회에서 몇 번 예배를 드렸었지만 코로나 이후로 예배를 참여하진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새벽 예배도 꾸준히 드리고 있어서 우리 부부를 위해서도 기도를 한다고 하셨다. 교회에서 집사를 맡고 있으신 아버지께서는 성경 읽기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셨다. 요즘 이사야서를 읽고 있다고 하셨다. 나에게 예배를 드리면 좋지만 여건 상 어려우면 시간을 내어 시편과 전도서는 꼭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난 아들의 의사를 존중해. 너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니 선택을 믿지만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항상 잘 되길 기도하고 있어.”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아버지께서는 신앙이 뚜렷하셨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셨었고 나도 그 영향으로 교회를 다녔다. 서울에서 교회를 다니시던 아버지께서는 동네 교회를 다니면서 이해관계 등에 얽히는 것을 싫어하셨고 한동안 교회를 다니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우리 삼 남매는 교회를 꾸준히 다녔다.


우리는 부모님을 위한 기도를 많이 드렸었다. 교회 행사에서 율동이나 연극을 하게 되어 초대도 몇 번이나 드렸으나 번번이 거절하셨다. 가족을 전도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매번 느꼈었다.


 새벽예배도 드리고 성서를 읽으며 열정적인 시간을 보냈었지만 의경은 종교활동이 지원되지 않았다. 2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이후 전역하고도 교회를 다니진 않았다. 대학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하느라 바빴고 취업해서는 주말에는 쉬지 못했다.


 이 시기에 오히려 아버지께서는 돌아온 탕자가 되셨다. 신앙생활을 놓으셨던 만큼 더 열정적이셨다. 애연가셨는데 담배조차 끊으셨다. 술도 줄이고 사람이 많이 변화하셨다. 표현을 잘 안 하던 분이었는데 애정표현도 자주 하신다.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서 좋지만 가끔은 건강부터 챙겼으면 좋겠다.


  토요일에는 눈이 많이 내려서 교회 앞의 눈을 치우느라 고생하신 모양인지 몸살이 나셨다고 했다. 3차 접종을 맞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그 걸 무리하시니  아들 된 입장에서는 오히려 말려야 할 판이다. 스스로 원하셔서 하는 일인 건 알지만 어머니께서는 종종 하소연을 하신다.


 힘들고 지칠 때 알게 모르게 여러 도움과 일이 잘 풀려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의 기도 덕분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시편과 전도서는 시간을 내어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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