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 몰츠의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911 희생자, 앤두류 그리고 그의 보모
911 테러 때 2,996명이 실제 시망 했지만 한인의 사망수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테러사건으로 한 아들을 잃고 20년간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한인, 폴김선생님이 있어서 인터뷰를 요청했고 인터뷰에 응해주어서 그때 당시에 어찌 되었는지 잠깐 그때 순간을 회상해 보았다.
“제 둘째가 앤두류이고 “
- "그러면 둘째가 그 당시 911 때 쌍둥이빌딩에서 근무를 했잖아요. 무슨 일을 했나요?"
“거기에서 금융 투자 분석가 일을 했어요.”
-"콜롬비아 명문대학교를 나오고 또 911에 희생까지 되는…… 그러니까 참 아까운 아드님이었습니다."-
“뭐 그렇죠.”
“그 당시에는 핀텍 재정 분석가를 모자라던 시기여서 콜롬비아에서 엔지니어 공부를 했으니까 그래서 거기서 발탁이 된 거죠!”
-"무슨 엔지니어?"
“산업공학이었어요. 산업공학하다가 금융투자가 장래가 있을 거라서 방향을 틀은 거죠”
-"똑똑하네요."
“9.11 그 빌딩 안에서 재정분석가로 한 3년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군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당시 쌍둥이 빌딩이 폭염이 일고 있었던 걸 나는 허드슨 반대편 인 뉴저지 쪽에서 빌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강변 쪽으로 나와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지만 이렇게 같은 한국가족의 한 사람이 이런 일을 당하고 있을 거라곤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러나 희생자 가족에게는 그 일이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그것 애환이었고 그때의 아픔을 끌어안고 살고 있던 사람은 그때 그 일이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그러면 아까 전에 질문 똑같은 건데 그 소식을 어떻게 들었나요?"
“그러니까 이제 쌍둥이 빌딩에서 에서 일한다는 건 알고 있었고 그 당시에는 가게에서 일하다가 뉴스를 듣지 않습니까?”
- " …… "
“손님이 없으면 뉴스도 TV도 보는데, 갑자기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에서 공개되더라고 그래서 뭐~ 나하고 직접 관계되는 건 아닌 것 같고, 어찌 보면 만들어진 드라마 같은 게 나오나 보다 했었지요?”
- " ……"
“그래도 이상하다 해서 전화를 했죠. 그랬더니 전화 통화가 안 되더라고”
그랬구나 부모는 자식하고 뭐가 통하는 게 있었나 보다. 김 선생님도 뭐가 다르게 느끼고 있었다고 진술하시고 있었다. 그냥 드라마라기엔 부모로서 확실한 확인이 필요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 ………"
“그래서 이거 봐라. 전화를 계속해서 하니까 계속 통화가 안 돼”
- " ………"
“나중에 뉴스 나오고 보니까 테러리스트가 쌍둥이 빌딩에 쳐 받아서 글쎄 빌딩이 무너져 내라는 사진이 나왔으니까”
- " ………"
“사실 거기까지도 내 아들이 희생자가 되어있으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고요.”
- " ………"
“어디 혼란 중이니까 애 엄마가 걱정되고, 어쩌면 이 사람이 잘 못될 수도 있으니 좀 기다려 보자 하면 잘 타이르고 있었지요.”
이런 대화도 내가 자식을 키워 보니까 충분히 알 것 같기도 했다. 본인도 의심스럽지만 가족부터 다독혀야만 했다고 했다. 그 심정이 보통 발생한 일도 감당키 쉬운 일은 아닐터인데 이런 일을 감당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아마 무게로 따지자면 500톤의 무게를 혼자 감당하고 있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김 선생님은 아버지였고 가장이었던 그 위치가 얼마나 힘든 직책인지 한마디 한마디 뚝 뚝 던져질 때마다 피한 줌씩 떨어지는 느낌이 들게 했다.
- " ……"
“나중에 한 3일 정도 있다가 명단 나오고 보니까 우리 애가 희생자가 됐더라고.
- "그 마음이 정말 참 힘들었겠습니다!"
“그때 세상이 벌어진 거고 난리죠. 애엄만 난리고……그렇게 키워서 콜럼비아까지 보내고 남들도 못 가는 월스트릿에 일하고, 정말로 남한테 진짜 자랑인데……그 자랑이.......”
- " ……"
나는 이대목에서 어찌 말을 거들 수가 없었다. 침묵하고 있었는데 김 선생님이 다음의 말을 이어갔다
“그 당시에 36명이 한 사무실에 있었는데 그 전날 일이 있어서 사고 발생 당일날 정각 8시에 출근을 못한 한 사람, 다른 한 사람은 또 바깥에 미팅이 있어서 나와서 있던 사람, 또 마지막 다른 한 사람은 아파서 못 간 사람 이렇게 3명이 생존자가 있더라고. 거기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었어요. 그 친구들은 다 CEO가 되고, 우리 아들만 그렇게 됐죠.”
-"그렇게군요."
“골프 할 땐 그들을 만나요.”
-"참 그러네요."
김 선생님은 그냥 하시던 대로 말씀을 하시고 있지만 그 눈에 이미 젖셔져 있어고 음성도 벌써 힘을 잃어가고 있는데 듣고 있는데 내가 뭐라고 거들수가 없었다. 이 아픔은 같이 나눌 수 있었는데 그가 지고 있는 짐의 무게는 어찌나 무거운지 내가 어찌 나눌 수도 나누어 받아 내지도 못하는 것이어서 듣고 있던 나도 그저 고개만 1인치 더 떨구고 듣고 있었는데 그러는 내가 애처로워 보였는지 김 선생님은 목소리 톤을 다듬어서 다시 말을 계속 이어갔다.
“어떤 자식은 CEO가 되어있고 어떤 자식은 세상에서 말없이 사라지고…… 지금 그러고 20년 이후니까
그러네."
“ 자기가 뭐 숙명이죠."
나는 다음의 말로 이 대화를 거들었다.
-"앤두류 그걸 당했을 때 어떻게 극복하신 거예요?"
아까도 잠깐 얘기를 지나갔지만 앤두류 아버지는 앤두류의 희생으로 나온 보상금으로 장학 재단을 만들었다. 그 재단에선 앤두류가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한다. 장남인 아들도 앤두류 어머니도 다 동의를 얻어서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노부부는 얼마 남지 않는 삶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었다. 앤두류 형이 재단 상임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말을 계속 이어 갔다
“예를 들어서 보상금으로 100만 불짜리 집 사가지고 산단 말이죠. 그 보상금으로 못 사죠! 그리고 거기서 살지도 못해요 거기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는 눈이 껌벅이면서 뭐가 또 올라오는 걸 누르고 있었다. 참 이대목은 듣고 있던 나의 가슴에 퍽~하고 뭐가 와닿았다. 아들이 살아 있으면 너무나 행복할 노부부인데 그 아들을 희생으로 주는 돈도 싫고 명예도 싫고 그 어느 것도 싫었던 거였다. 세상의 어느 것도 아들, 앤드류를 대체해 줄 수 있는 것이 그 노부부에겐 아무것도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살 수 있다더라도 의미가 별로 없잖아요. 의미도 없지만 그건 아들의 피인데. 그러니까.”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들 피, 아들 피, 하면서 몇 번을 더 반복했다. 앤두류 아빠는 2001년이 일이 발생한 후부터. 이로부터 엔두류 추모 콘서트 시리즈를 한다. 그 순서로는 인문학 포럼, 토론회, 평화 포럼이라는 걸 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아서 토론하고, 모이는 것을 공식화해서 한인들만 100면 정도 모이는 모임을 매해 가져왔었다. 그중에서 발제자 나오면 해당 주제와 연관된 발제하고 토론과 질문하는 공식행사를 가진다. 주로 주제가 왜 911일이 났는가?, 어떻게 났느냐? 어떻게 이런 일들을 방지할 것인가? 그리고 차세대 청년의 리더십에 대한 주제로 이어진다. 그런 주제로 해서 한인 커뮤니티에 크고 작은 굉장히 진취적 행사를 정구적인 행사로 만든다. 콘서트도 하고, 포럼을 열어서 엔두류 추모하는 대회로 이름이 계속해 나가고 있다. 김 선생님은 아들 앤두류를 대치할 훌륭한 차세대 지도자를 찾고 있는 중이다. 그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이렇게 메인 포럼이 들어가는 것이 아들이 좋아할 것 같고 아들이 살아 있어도 이런 행사를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을 했다.
“우리 한글, 한국말에 두 루 두 루라는 말이 있습니다. 두루두루. 모두 다. 모두 다. 너도 나도……”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두루두루, 전부 다 똑같이."
“그게 홍익사상의 근본 기조 아이디어거든요."
“그런 기조로 된 민족은 어디 가든지 막을 수가 없고, 어디 가든지 환영을 받을 수밖에 없고…… 어디 가든지 리더가 될 수가 있단 말이에요. 이익을 받게끔 하면 어디 가겠어요. 자연히 리더가 되는 거지”.
뉴욕에 한인 자녀들로 리더를 만들 자는 AKIM이란 한인단체가 있다. 이 단체에서 홍익인간에 대한 사조를 차세대에게 가르친다. 앤두류 아버지는 그 단체 주회원이어서 자기 죽은 자식을 생각해서 이런 이야길 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래서 다음을 질문했다.
-"지금 사신 연세가 84세이시잖아요. 만약 돌아가서 딱 한 가지 바꾸고 싶으면 바꾸고 싶은 게 있다면 뭐 있겠습니까?"
벌써 한순간도 잊지 못했을 그 사건이 2001년에서 20년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기대하고 질문한 질문이 아니었다. 죽은 애두류를 너무 이야기하다 보니 분위가 너무 침체된 것 같아 보였다. 그렇지만 정확한 질문이 아닐지 모르지만 미국생활을 벌써 64년째 하고 계신 김 선생님에게 뭔가는 남 다른 생각을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폴김선생님이 말을 이어 갔다.
“지난 10년 동안에 구체적으로 생각했는데 크게 생각하고 Think Big, 절대 포기 말고 Never Give Up, 정확하게 꿈꾸고 Get More Specific.”
-"좋습니다."-
라고 추임새를 놓자마자 계속 이야길 했다.
“이거 아주 앤디의 캐치프레저로 사용해도 될 것 같은데 그것이 뭐가 되어도 상관없어요. 이게 앤디가 남겨주는 생각이야. 그리고 앤디가 왜 남겨주고 있냐면 앤디는 지금 우리랑 같이 있지 않아요. 앤디의 DNA를 가진 아버지가 생각하는 건 앤디가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청년들한테 이걸 뿌려주어야겠어요.”
죽음을 당한 앤두류와 조금 띠어 놓으려 했던 의도였는데 역시 이분은 앤두류의 아버지였다. 잠시도 앤드류 없이 못 사시는 분이었다. 자기 생각과 같을 거라면서 청년들에게 '너도 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있었다. 앤두류의 몸은 하나의 밀알이 되어 떨어져 있었는데 앤두류는 아버지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속 말을 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말을 이어서 했다.
“이제 궁극적인 꿈(ultimate dream)이라고 그럴까요? 그런 면에서 볼 때 KSEA라고 혹시 아세요?
KSAE( Korean Scientist and Entrepreneur Associatio)는 한국과학기업인 협회였다. KSEA, 한국과학기업인 협회는 재미 과학자 들와 그들과 함께 미국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기업인들의 협력단체이다. 김 선생님의 앤드류 재단에서 이 기관에 자금조성을 도와주고 있었다.
“거기에 1년에 한 번씩 포럼을 해요. 컨벤션을 하는데. 거기에 지난 한 18년 되나? 거기에 장학금을 제공해 줘요. 거기는 뭐 전부 다 석박사들이 다 모이는 데니까. 이제 나가서 말을 하죠.' 나는 무식한 사람이니까 당신 석박사들 앞에서 얘기하는 게 참 영광이다'말이죠. 그러면 애들이 웃죠."
“ 그다음에 웃음 끝나면은 내가 이제 정색을 하고. '너 이놈들 여태까지 노벨상도 못 받고 이러고 계시는데 ……어떻게 된 거냐. 왜 이래~.' 그러면 애들이 시무룩해져다가 쫘악하고 재미있다네. 그리고 다들 웃어요.”
그는 웃음까지 주는 기부가였다. 그리고 전부 다 석박사에 과학자, 교수를 한테 노벨상 언제 탈 거냐고 졸라대는 동네 어르신이었다. 하나하나 젊은 들의 손을 비겨가면서 당신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설득하는 이웃집 아저씨기기도 했다. 폴김은 젊은 한국인으로 자랑할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돕기 위해서 앤드류재단의 운영하시고 있는 분이고 아들은 지금 그와 함께 있지 않지만 그가 아는 지원단체에서 아들만큼 똑똑한 인재가 나와서 한인사회를 잘 이끄려 주기 바라시는 참 좋으신 노 신사였다. 지나가다 지쳐서 쓰러진 한 행인의 생명에게 손을 내밀어 살려주는 한 사마리아인이었고 내가 어렸을 때 지나가시다가 유산시키려는 걸 막 하셨던 옛 동네의 교장 선생님 같은 분 바로 그분이었다. 그는 과학자 기업인 협회에도 정기적으로 기금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말을 했다.
“앤두류가 졸업한 고등학교가 있어요.”
앤두류는 뉴저지 레오니아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미국유명 대학의 입학은 유명고등을 졸업해야 선택된다. 그런데 레오니아학교는 그리 유명하지도 그렇다고 특별난 학교도 아니었다. 그저 빈민층의 아이들이 많은 곳 그런 고등학교였는데 그런 학교에서 컬럼비아란 대학을 입학했다면 이것 전교에서 하나 나올까 말까 한 확률이었다.
-"아니 앤디가 진짜 공부 잘한 것 같네요. 레오니아에서 컬럼비아로 가요?"-
“ 맞아요 그 당시에는 정말 칭찬받았죠."
레오니아에서 보통 일 년에 2명 정도 아이비리그 유명대학을 들어갔다. 그런데 아이비 명문 중에도 컬럼비아는 상위권의 학교였다. 상위권은 스탠퍼드, 하버드, 컬럼비아였다. 그렇다면 이아이, 앤두류는 전교 일등한 학생임이 틀림이 없었다. 내가 말했다.
-"이 얘는 진짜 천재네요. 레오니아에서 좋은 학교 가는 애들이 없어요."-
앤두류 아빠는 대답했다.
“요즘에 그래요? 없어요."
앤두류 장학재단에서는 앤두류가 일이 생겼던 911 그러니까 2001년도부터 매년 앤두류 이름을 학교에 기부금을 보낸다. 참 말로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던 앤드류는 어찌 그동안 좋은 아버지 밑에서 앤두류가 자라었을지? 과히 짐작이 되고 남음이 있었다. 비록 앤두류는 30전이라는 젊은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을 거란 생각 들었다. 지금은 천국에 있을 거란 생각으로 짠 했던 마음을 조금의 위로로 전환해 보려고 해 보았지만 그래도 아쉬웠고, 너무 좋은 대화의 시간이었다. 김 선생님 그리고 앤드루재단이 앞으로 더 많은 빛을 발하고 좋은 차세대 인재들이 나오길 바랄 뿐이다.
몰츠의 상상; 팁 6- J의 산타기
나는 나를 괴롭히는 문제가 발생하면 집 뒷산을 맨몸으로 뛰어 올라간다. 몸을 혹사시키면서 문젤 해결하길 기원하면서 빠르게 뛰어 올라간다. 묘한 일은 올라갈 때 스트레스로 괴로움을 당하던 정신적 고통이 몸으로 이전될 때면 몸은 거의 죽을 맛이다. 거칠어진 숨소리만 있을 뿐, 나의 몸은 이미 죽음의 임계점을 넘은 상태가 된다. 정상에 오른 후엔 다시 숨을 고르기가 끝난 후에 내려온다. 그때쯤이면 몸도 맘도 편안해지지만 산밑에 문제는 여전히 버티기고 있다. 그런데 참~이상한 일이 …… 더 이상 그 문제가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정신이 강건해져서인지? 저 산밑에 쭈그리고 있던 골리앗이 더 이상 상대 못할 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해 볼만한 상대로 보인다. 정신이 강건하니 그 문제 바라보던 혼의 눈높이도 달라진 걸 느낀다. 아주 내가 바라던 좋은 현상이다. 나는 육과, 영과 혼을 동시에 연결되었음을 증명하는 실험으로 J의 산타기라 칭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