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스웰몰츠식 성공체험; 자아를 깨워라
야호! 새 직장
드디어 그 어려운 고난을 이겨내고 새 직장에 취직을 했다. 팀플레이를 화두로 삼은 통에 취업이 성공된 회사가 알파란 그리스 알파벳이름부터 시작해서 오메가란 이름의 회사까지 총 24여 개를 가진 중소기업이었고, 다른 하나는 롬 앤 하스란 대기업이었다. 하나도 없던 직업이 둘이 졸지에 생겨니 좋은 일이지만 그것도 좀 난처했었다. 두 회 사 다 봉급은 켄테기에 보다 다 2.5배였다. 난 그 사람들이 맘이 바뀔까 봐서 당장 짐을 챙겨서 그다음 주에 쏜살같이 출근해야 했는데 둘 중에 어느 한 개도 버리기가 아까왔다. 하는 수 없이 나의 멘토박사님에게 연락했다. 나의 멘토 박사님은 적극적으로 중소기업을 추천해 주었다. 그 이유는 이 회사가 나를 더 필요로 할 거라는 조언이었다. 나중엔 말씀하신 대로 몇 년 후엔 이 회사가 미국에서 제일 큰 화학회사인 더불유 알 그레이스회사로 병합까지 되었다. 어쨌든 그땐 뭐가 되려는지? 이번에 나의 멘토박사님의 말씀에 군말 없이 동의를 했다. 그런데 이렇게 군말 없이 따랐던 이유가 더 있었다. 애들이 생겼기 때문에 더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지만, 뉴욕이랑 훨씬 가까운 뉴저지가 멀리 떨어진 필라델피아보다 애들 교육에 훨씬 나아 보였던 이유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결국 가정을 가진 후엔 나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애들의 장래가 결정 요인이 되고 있었다. 내 가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애들의 교육이 있었다. 서둘러 저쪽 회사, 롬 앤 하스에겐 못 간다는 서신을 보냈더니 이제 봉급을 더 올려 주겠다는 통보가 왔다. 잠깐의 혼동이 왔다. 나는 몰츠의 메타인지법으로 두 회 사 중에 한 개를 선택해야 했다. 그동안을 많이 연습해 왔기 때문에 그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내린 결정도 동일하게 나왔다. 그리고 이쪽 회사로 아주 빠르게 회사에 서둘러 출근했다. 이 회사엔 모두 유태인들이었는데, 그리도 빨리 조인한다는 통보에 좀 놀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배치된 회사는 수많은 그리스 자음알파벳에서 엡실론이란 회사였다. 그 회사의 연구소에 연구소장이었던 탐박사 나갔다. 프로젝트 한참 중에 이곳 사람들과 크게 다투고 자진 퇴사해 버린 곳을 내가 박차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회사에선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에 명목상이라도 박사학위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회사는 연구소 소장 자리에 맞게 박사학위를 얻을 수 있도록 유태인네트윅 내의 대학을 추천받아서 공부하는 조건이었다. 물론 졸업할 때까지 모든 학비를 회사에서 감당하기로 했다. 나에겐 전혀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이미 나는 그들이 필요한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경험도 넘치는데 학위가 아직 없었다. 산업체와 학교가 관계있었던 이 회사는 유태인들이 추종하는 네트윅크 대학을 추천했다. 나에겐 굳이 대학교 교수자리로 갈 마음이 없었기에 가야 할 대학이 난 꼭 내가 알고 있던 아이비리그일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유태인의 네트윅크안에서 해결되었다. 이미 회사의 연구들 중 사업비밀만 빼고 논문에 써도 되다는 허락까지 받았으니, 이 정도는 이미 박사학위 받은 일은 시간만 문제였다.
어렵고 힘들었던 일들이 이렇게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퀼리 떨어질 땐 한강만큼 넓은 허드슨강에 앞에서 넉 나간 사람처럼 서있었고 창피해서 같이 공부하던 학우들에겐 아예 얼굴을 들고 다니기다 불편했었는데 그리도 어렵던 직장도, 창피만 했던 퀼리도 이렇게 해결되었다.
그리고 나는 하나 더 내가 진짜로 서둘러야 했던 이유가 - 그들이 놀래건 말든 간에 - 나에게 급한 일이 바로 집이 날아가는 일이었다. 나는 이공계 계통의 공부만 했었기 때문에 민법 특히 경매법을 몰랐다. 그땐 모게지를 못 내면 연체된 다음 달로 집이 경매로 넘어가는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보통의 도를 넘고 있었다. 내 집이 통째로 날아가는 줄 알고 있었기에 켄터키 집이 경매에 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하나하나가 초를 재는 일처럼 서둘렀다. 그러니 첫 월급 타서 밀렸던 생활비 그다음 주급으론 모게지를 냈다. 정말 랄프가 산의 정상을 정복하는 기분이었다. 야호~ 직장도, 집도, 가정도, 학위도 모두가 그것도 한 번에 해결되는 순간, 그 순간이었다. 어찌 되었던 내가 상상했던 하나하나의 그림들이었다. 나는 어려울 때면 하나씩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가며 따로따로 상상해 왔었지만 동시에 한 번에 모두 이뤄진 거였다. 그 힘들었던 시간이지만 견뎠고 또 간절히 바람과 함께 그날을 기다려 왔었다. 이게 단지 한꺼번 한날에 온 것뿐이었다. 이후부터 배운 것은 내가 상상도 못 하는 걸 누구가 해준다거나 아님 자연현상적으로 이루지는 이벤트는 안 하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몰츠의 상상으로 성공하고, 그리고 그 상상력을 제대로 쓰고 있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이부에 한 번씩 봉급이 나왔기에 두 주가 더 지난 후엔 새로 탄 봉급으로 켄터키 집이 날아가기 일보 직전에 모게지를 보냈다. 그리곤 우리 식군 거의 일 년간 뉴저지 주에서 집을 구할 때까지 고급 호텔 스위트 룸까지 허락을 받아 완전히 귀족 대우 속에 지냈다.
"빨래 어디다?"
"빨래! 문에다 놔"
"엉"
"점심은?"
"그거 1층 식당에서 먹고 이방 번호만 알려줘"
"응"
"내 구두에 구두약 칠해야 하는데"
"같이 놔"
"어"
"찬? 백화점에 가야 하는데…"
"거기 주차장#3에 빨간색 랜트카"
"옹 오호~ 차까지"
"ㅎㅎㅎ"
나에게 링컨 타운카를 내 주웠다. 정말 인생의 고난에 수렁에서 완전히 회복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린 그 후에도 그걸 타고 13시간 동안 애들을 데리고 켄터키에 새 전세 입주자가 올 때마다 다녀오곤 했다. 월세금 받으러 …… ㅎㅎㅎㅎㅎ. 그때마다 켄터키에서 태어난 둘째 아이는 명절날에 고향 가듯이 자기 고향 가는 것처럼 그렇게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