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판을 소홀히 대하지 말라
오랫동안 인사업무를 해왔으니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할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나름 사람을 보는 데 기준도 있고 실제로 성공 확률이 높은 편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회사에서 보여 주던 모습과 실제 본모습이 크게 다른 사람을 마주할 때면 그동안의 인사 판단에 대한 확신이 급하락 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에게 보이는 외적 캐릭터를 가지고 산다. 심리학자 칼 융은 이것을 페르소나라 불렀다. 자신의 자아와는 별개의 가면의 쓰고 산다는 것인데 그 가면이 가짜인 것 같지만 사실은 온전히 가짜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자아를 숨기며 사는 일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부부동반으로 네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2박 3일을 같이 지내는 동안 여행지에서 본 남편들의 모습은 회사에서 보던 이미지와 사뭇 달랐다. 회의실에서는 나름 카리스마가 작렬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아내 앞에서는 마치 순한 양처럼 행동을 한다. 음식을 서로 나눠 먹고 아내의 한 마디에 이미 한 주문을 바꾸기까지 한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그런 행동이 반복되니 차츰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동안 내가 보아 온 모습은 직장이라는 무대에 맞춰 쓴 페르소나였을 뿐이었다. 여행지에서 본 그들은 원래 다정하고, 때로는 손해 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본성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곰곰이 떠올려보니, 사실 회사에서도 그들이 늘 엄격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일에는 철저하고 냉정했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상황과 역할에 따라 표현 방식이 달랐을 뿐, 사람의 결 자체가 다른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보면 페르소나와 자아는 다른 듯 보이지만, 완전히 분리된 존재는 아니다.
문제는 페르소나가 단순한 역할 수행을 넘어설 때 발생한다. 오래 유지된 가면은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오해되기 쉽다. 하지만 아무리 역할에 충실해도 사람의 깊은 결은 특정 순간에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사람은 각자 자기만의 우주를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우주는 성장 과정에서 조금씩 확장되거나 다듬어질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경우는 드물다. 분노를 다루는 방식, 약자를 대하는 태도, 권력을 인식하는 관점 같은 것들은 남의 조언이나 교육만으로 쉽게 교정되기 어렵다.
최근 정치인들의 ‘보좌관 갑질’ 사건이 연일 기사화되고 있다. 겉으로는 한없이 고상하고 남을 위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던 인물들이, 뒤에서는 그 이미지와 상반되는 말과 행동을 했다는 사실이 대중을 허탈하게 만든다. 그동안 자신의 본성과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느라 얼마나 피곤했을지 짐작을 해 보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아무리 페르소나 뒤에 숨으려 해도 본성을 숨기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가면 쓴 얼굴 역시 그 사람의 인격에 기반한 또 다른 자아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리더십의 실패도 종종 능력의 문제보다 인격의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을 보면 인간에게서 무엇을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A는 상사에게 유능한 사람으로 보이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유수의 대학을 나왔고 공인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모와 말솜씨가 남달랐다. 새로 부임하는 상사들마다 A를 신임했고 그의 커리어는 탄탄대로를 걷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부하들이 A의 거친 리드 방식에 불만을 터뜨린 것이다. 결국 A는 스스로 회사를 떠나는 결정을 한다. 이후 몇몇 회사를 옮겨 다녔지만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최근에는 공인 자격증을 바탕으로 개인사무실을 열 계획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런 이야기가 꼭 오늘날 조직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사람의 인격이 권력과 결합될 때 어떤 결과를 낳는지는 역사 속에서도 반복되어 왔다. 로마의 네로황제가 그렇고 조선의 연산군이 그랬다. 연산군은 시기심이 많은 모진 성격으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성향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 성종은 그의 성품을 알고 있었음에도 세자로 책봉했고, 그 결과는 사화와 인재 말살, 국정의 붕괴로 이어졌다. 연산군의 폭정은 폐비 윤 씨 문제 등 몇 가지 원인자를 들이대기도 하지만 그것에 더해진 타고난 본성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지점에서 인사의 가장 어려운 질문이 등장한다. 사람을 어떻게 판단해 골라야 하는가이다. 이력서, 자기소개서, 면접, 프레젠테이션까지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있지만 한계는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AI는 똑똑한 비서가 되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지나칠 만큼 잘 만들어 준다. 면접 역시 다양한 컨설팅을 통해 익히고 나타나면 본래의 그를 알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선발해야 하는지는 나그네가 첩첩산중에서 길을 찾는 형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럴수록 가장 정직한 자료는 그 사람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있다. 특히 어떤 성과를 냈는지도 중요하지만 그 성과를 내는 과정에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사람인지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평판조회(reference check)는 앞으로 사람을 선발하는 데 있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평판조회는 흠을 잡기 위한 뒷조사가 아니다. 미래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특히 평소에 그 사람이 어땠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시해야 할 문제다. 새로운 사람을 조직 내부로 들일 때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자리에 적임자를 고를 때도 주변의 평판을 두루 살펴서 최적의 인물인지를 판별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잘못 선택한 리더 한 명이 조직의 미래를 송두리째 거덜 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을 망치는 사람은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 권력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이다. 능력은 부족하면 보완할 수 있지만, 인성은 잘못 선택하면 되돌리기 어렵다.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관계가 촘촘한 사회에서, 평판을 확인하는 수고를 아끼는 것은 결국 더 비싼 대가로 돌아온다. 사람을 바꾸겠다는 낙관보다는, 사람을 제대로 보겠다는 생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믿기 전에 한번 더 확인하자는 이야기다.
인사는 희망이 아니라, 확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