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위대하다
AI 시대가 되면 지금까지 사람이 해 왔던 많은 일들을 AI가 대신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이미 많은 영역에서 인간과 AI가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 그룹이 생산 현장에 아틀라스 로봇을 도입하겠다고 밝히자, 노조가 로봇의 현장 진입을 막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산업혁명 초기 기계 도입에 반발했던 러다이트 운동을 떠올리게 하는 충격이다. 한 때 가장 안전한 전문직으로 여겨졌던 변호사와 회계사조차 AI의 위협을 받고 있다. AI의 위력이 어디까지 떨치게 될지 자못 궁금하다.
최근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들이 있어 저녁에 AI에게 조언을 구했다. 내심 그의 신공에 기대를 하고 현명한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받아 든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현존하는 데이터를 찾아 요약하고, 여러 가능성을 균형 있게 정리하는 데는 탁월함을 보였지만, 앞을 내다보는 것까지는 익숙지 않은 모양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책임감이다. 인간은 어떤 의견을 제시할 때, 그 말이 자신을 어떻게 규정할지를 함께 고민한다. 그 말에는 자신의 철학과 경험, 그리고 이후 결과에 대한 책임이 전제된다. 그래서 우리는 조언을 아무에게나 구하지 않는다. 전문성과 함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묻는다. 그 사람의 말이 곧 그 사람 자신이기 때문이다.
반면 AI는 의견을 주지만 책임은 지지 않는다. 객관적인 사실을 조합해 최적의 해를 제시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를 떠안지는 않는다. AI와 인간은 이 지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AI는 이용자의 의견에 반기를 드는 법이 없다. 혼을 내면 혼내는 대로, 칭찬하면 칭찬하는 대로 받아들이기만 할 뿐 자신의 의견을 소신 있게 밀어부치는 적이 없다. 잘못하면 인간과 AI가 집단사고에 빠질 우려가 있다.
<세종실록> 세종 7년 12월 8일 기록에 따르면, 가뭄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고통받자 세종은 의정부와 육조의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비록 태평한 시대에도 대신(大臣)은 오히려 임금의 옷을 붙잡고 강력하게 간언(諫言)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하물며 지금과 같은 때에 과감(果敢)한 말로 면전에서 쟁간(爭諫)하는 자가 없으니, 어째서 지금 사람은 옛사람 같지 못한가.”
세종은 신하들과 총 1,900회나 경연(經筵)을 통해 토론했다. 토론을 거듭한 이유는 좋은 정책을 만들기 위함만이 아니라 신하들이 책임을 느끼고 그 책임을 함께 나누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AI의 등장은 분명 경이롭다. 지금까지 없던 편의와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지금 내가 느끼는 이런 간극을 과연 AI가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AI가 이력서를 검토하는 시대다. 사람이 하던 일이다. 그렇다면 인사담당자는 필요 없어질까? AI는 통계적으로 우수한 사람을 가려낼 수 있다. 하지만 통계적 확률이 높다고 해도, 그 사람이 우리 조직에서 적응하고 성장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인간의 판단 영역이다. 인사담당자는 AI의 제안을 참고하되, 그 선택에 책임을 지는 존재로 남는다.
평가도 마찬가지다. AI가 데이터를 기반으로 순위를 매길 수 있다. 그러나 직원이 그 결과에 낙심했을 때, 그 책임은 누가 질까? 리더다. 리더는 데이터를 읽되, 그 숫자 뒤에 있는 인간의 가능성과 맥락을 함께 본다.
조직문화를 형성하는 것도 인간이다. 인간의 오묘한 심리상태와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조합들을 AI의 판단에 의존하기는 어렵다. 결국 모든 것을 책임지는 데는 사고하는 인간의 철학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AI의 한계는 오히려 다행스럽기도 하다. 인간의 관계가 그리고 의사결정이 기계의 판단에 의존하게 된다면 인류의 진화는 과연 계속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측면에서 다른 동물과 다르다. 그것을 멈추고 과거의 데이터에만 기대는 존재가 되는 순간, 인간의 의미는 퇴색될지도 모른다.
아직 우리에게는 고민할 수 있는 능력과, 나만의 특이점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도 생각하며 산다. 그리고 그 사고의 힘으로 존재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사랑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AI는 강력하다.
인간은 여전히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