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의 무게를 벗고 AI 로 기획부터 개발까지 홀로 서기
AI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경량문명’이라는 단어를 한번 쯤 들어봤을 거다. 마침 삼프로에 단어의 창시자인 송길영 작가가 나왔기에 한번 그 내용을 여기다 풀어 보려고 한다.
그는 이제 개인이 기업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고 했다. 큰 규모의 조직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거기서 뛰쳐나온 개인이 인공지능이란 요술로, 마치 손오공처럼 머리카락을 분신처럼 뽑아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 회계사를 동시에 호출하는 세상이 오고 있다는 소리다. 그것도 월정액 십만원도 안되는 헐값에.
기업은 신입사원을 뽑지 않는다. 핑크 플로이드가 약에 절은 기타리스트를 내쫓고 그 공백을 길모어로 갈아 치웠듯, 이미 완성된 사람만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 급이면, 굳이 밴드에 들어갈 이유가 없어진다. 차라리 자동화된 수익을 창출하는 플랫폼을 통해 개인 앨범을 내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다. 굳이 계약서 써 가면서 거대 기획사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진다.
기업의 풍경도 변해간다. 과거엔 말단 사원이 밤새워 만든 기획안을 대리, 과장, 차장을 거쳐 부장님의 결재판에 도장이 찍힐 때까지 지루한 ‘결재 마라톤’을 해야 했다면, 지금은 그 모든 잡무를 AI인턴이 처리한다. 남겨진 유능한 사원이 결과물을 훑어본 뒤 책임지고 ‘승인’ 도장만 찍는 프로세스만 남았다. 결과값이 마음에 안 들면? 소리를 지르는 대신 프롬프트 나사만 살짝 조율하면 그만이다. 서류 뭉치를 들고 복도를 뛰어다니던 풍경은 이제 80년대 시티팝 뮤직비디오에서나 볼 수 있는 빈티지한 유물이 되어간다.
이쯤되면 우리는 교육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전통적인 공부 방법은 옳은가? 인공지능으로 시험을 치르면 안된다고들 하는데, 인공지능으로 충분히 답을 낼 수 있는 문제를 내는 것이 다가올 세상에 대한 대비로서 합리적인가? 학벌이라는 성벽을 견고하게 쌓아왔다고 자부하던 계층이 삽시간에 모래성으로 바뀌어 버리는 현실을 넋놓고 바라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 AGI라는 거대한 파도가 예보되고 있는 마당에 말이다.
고전 제목 하나가 떠오른다.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 소설 속 젊은 예술가는 평론가가 무심코 던진 “당신에겐 깊이가 없다”는 말 한마디에 매몰되어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고 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거울 앞에서 다시 한번 이 ‘깊이’를 강요받는 시대를 살게 되었다. 학벌도 스킬도 모두 해체되는 이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유능한 인재가 되어야 하고, 어떻게든 AI를 파헤쳐서 도구로 부릴 줄 아는 요술을 부려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
송길영 작가를 비롯한 많은 오피니언 리더들은 말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열심히 파고들라고. 이건 참 고전적인 주문이다. 근데 어쩌나. 인공지능이 모든 보편성을 확률의 통계로 치환해 버리는 밋밋하고 효율만 바라보는 세상의 빈틈을 파악하려면, 나만의 ‘덕질’과 개인적인 취향을 발판삼아 복제 불가능한 데이터를 만들어 내는 수 밖에 없으니.
그러니 당신의 귀가 라디오헤드의 실험적인 음악에 꽂힌다면 열심히 들어라. 어떤 장면이 인상적인 애니를 보았다면 그 색감과 구도가 당신의 영혼을 어떻게 건드리는지 집요하게 기록하라. 문장이 인상적이었다면 그것이 웹소설이든 고전 문학이든 무슨 상관인가. 끝까지 읽고 파헤쳐라. 기계나 로봇의 정교한 기계적 매커니즘에 매력을 느끼는가? 혹은 역사서를 읽는게 즐거운가? 일단 자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끊임없이 탐구하라.
아직 늦지 않았다. 인공지능이 우리 삶의 문법을 바꾸기 시작한 건 대중적으로 따져봐도 고작 3년 남짓이다. 이제 막 전주Intro가 끝났을 뿐인데 벌써 공연이 끝났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경험에 AI라는 증폭기를 연결하자. 도구는 이미 충분히 영리해져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