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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연애에 물들다

타이베이, 말할 수 없는 비밀 2

by Dear Lesileyuki

엄마는 여전히 섬세했다. 나의 손끝에 닿는 엄마의 가녀린 팔과 어깨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정을 깨닫게 했다. 발레를 했던 엄마는 모든 동작이 춤 같았다. 우아하고 부드러웠으며 심지어 눈빛도 춤추는 듯했다. 엄마는 조각가인 아버지의 뒷바라지를 위해 자신의 춤을 포기했다. 대신 내 앞에서 춤을 추고, 아빠를 닮아서 몸치인 나에게 발레 동작을 가르쳐주려고 했지만 나는 아빠의 작업실에서 흙 만지는 것을 더 좋아했다.

“단팥죽 먹을래?”

엄마가 나의 눈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항상 나의 눈에 집중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로 가서 앉았다. 주렴처럼 드리워진 공중 뿌리가 바람에 나부끼는 세월의 나무가 바로 카페 앞에 있어서인지 젊은 남녀가 카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나무 아래 놓인 붉은 벤치가 한가롭다. 남녀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후 하늘색 스쿠터를 타고 골목으로 사라졌다. 연인일까? 나는 그들이 사라진 골목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처럼 느껴진다. 엄마도 나도 창밖의 세월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하는 바람도 그리고 나무 아래 놓인 붉은색의 벤치와 나의 이혼도.

엄마가 단팥죽을 내 앞에 놓아주었다. 그리고 춤추듯 사뿐사뿐 걸어와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지우펀 스타일이 가미된 단팥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수저를 들었다. 내 입맛이 변한 건지 엄마의 솜씨가 변한 건지 예전의 그 맛이 아니었다. 그리움의 맛 같은 것은 눈곱만치도 없고 그저 달고 진한 단팥죽이었다. 도저히 감동적인 표정을 지을 수가 없다. 내가 너무 감상적인 맛을 기대했나 싶어서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눈을 반짝이며 그런 나를 봤다.

“그 맛이 아니지?”

엄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사랑만 변하는 게 아닌가 봐요.”

나는 그래도 엄마의 성의를 봐서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둘 다 어른이니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지우펀의 계단을 오르며 다짐을 했으나 감정이 먼저 작동해 쉽게 마음을 열 수가 없다.

“너무 오랜만에 해서 비책을 까먹었다.”

엄마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웃는 엄마의 모습이 소녀 같았다. 하얀 셔츠에 헐렁한 청바지를 입은 엄마는 여전히 아름답고, 슬퍼 보였다. 웃고 있어도 눈은 항상 슬펐다.

내 기억 속의 엄마는 항상 하얀 셔츠에 낡은 청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늘 초록색 리넨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엄마가 셀러리 같다고 생각했다. 섬세하기 흔들리는 초록빛 잎과 투명하고 긴 연초록의 줄기가 걸어 다니는 것 같았으니까.

“남편은 잘 지내?”

“이혼했어요.”

“아”

엄마는 놀라지도 않는다.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가만히 웃으며 고개만 끄덕인다. 그러더니

불쑥 물었다.

“흠,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데?”

“어떻게 알았어요? 딱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하긴 엄마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우리를 떠났으니 그 기분을 알겠네요. 그 사람이 그러데요. 사랑했고, 사랑하지만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나는 뭐 그런 정신 나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이해가 안 되지만.”

나는 엄마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당신이 떠난 후 아빠와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얼마나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물론 다 지난 일이지만.

엄마가 그런 나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봤다. 엄마는 변명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엄마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적어도 자기변명이라도 해서 나를 설득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그렇게 말한 사람은 네 아빠야. 그때의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어. 네 아빠가 나의 우주였고, 너는 별이었지. 내 인생에서 둘을 빼면 제로가 되는 시절이었단다.”

엄마가 가을 초저녁에 부는 바람 같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가 아니었어?”

나는 지금까지 믿어온 사실이 진실이 아니었다는 말에 순간 충격을 받았다. 나는 늘 엄마가 우리를 버리고 떠났고. 다른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를 잊었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고, 아빠의 서랍에서 발견한 엄마의 향수병은 아빠의 슬픈 사랑을 증명하는 그것으로 생각했다.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내가 아빠에게 가스라이팅 되었던 것일까? 나는 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일까? 장례식날 엄마를 반기는 아빠의 친구들은 보면 엄마는 남편을 버리고 떠난 여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엄마를 반가워했다. 아빠와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하고 모든 작품과 전시를 관리했던 큐레이터, 애니도 엄마를 끌어안으며 반겨줄 정도였다. 그러나 엄마는 반응이 좀 늦었다. 애니를 살짝 밀어내며 정중히 악수를 청했다. 그리곤 대학 동창인 아빠의 친구들과 다시 열열한 포옹을 나눴다.

그날 남편이 말했다.

“어째 애니 윤이 까인 것 같은데? 장모님 은근 포스 있다.”

아빠는 꽤 유명한 조각가였다. 그런 아빠의 작품이 돈이 되게 만드는 재주가 애니에게 있었다. 덕분에 나는 아빠의 토스카나의 작업실에서 신나게 놀 수 있었다. 말하자면 엄마 빼고는 다 있는 아이였다.

“오늘은 단팥죽을 먹은 걸로 만족하자. 며칠 있을 거니?”

“일주일쯤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아침은 항상 여기 와서 먹어.”

“생각해 볼게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왜 내 이름을 ‘일락’이라고 지었어?”
“아빠가 가장 좋아한 꽃이 라일락이었고, 마침 아빠가 ‘나’ 씨였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항상 라일락을 주고 싶었지. 평생 함께할 거로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잘 안 됐어.”

엄마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눈빛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보았다.

엄마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슬픔의 강이 흐르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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