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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연애에 물들다

타이베이, 남색 대문

by Dear Lesileyuki

숙소로 돌아와서도 엄마의 눈빛이 잊히지 않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가슴 밑바닥에 눌어붙은 연민인가? 아니면 엄마의 마음이 나에게 스며든 것일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둡고 막막한 푸른빛의 북쪽 바다를 닮은 눈빛에 스치듯 베여서 마음 한구석에 상처가 생겼다. 불편하고 그래서 마음이 더 쓰인다. 엄마와 나의 관계는 쿨해야만 하는데, 일말의 애정도 없어야만 하는데 자꾸만 엄마의 시간에, 시선에 신경이 쓰인다.

그동안 나는 왜 단 한 번도 엄마 편에 서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어릴 때는 어려서 그렇다 치고 결혼하고 엄마처럼 이혼한 후에도 모른 척했다. 아빠의 장례식에 엄마가 참석하지 않았다면 내 인생에서 엄마는 남보다 못한 존재로 계속 남았을지 모른다.

나는 서울의 애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쩌면 그녀가 엄마에게 상처를 준 장본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호는 갔지만 애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빠의 작품들을 모아 추모전을 기획하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러려는 것일까? 애니는 아빠가 죽은 후 일에 더 몰두했다. 슬픔을 일로 덮어버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몹시 야위었고, 눈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남편, 아니 이제는 전남편이라고 해야겠다. 그는 장례식 내내 애니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일방적이고 집요한, 지독한 사랑이라고 했다. 그가 사랑에 관해 언급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와 달리 은밀하고 농염한 사랑에 빠져 있던 당시의 그에게 애니가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애니가 학교에 나타나면 담임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일단 애니가 짙은 향수 냄새를 날리며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담임은 벌떡 일어났다. 애니가 미인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담임 정도는 입을 꾹 다물게 할 만한 카리스마를 스카프처럼 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 기획자이자 아빠를 포함한 예술가들의 뮤즈였기에 그녀에게는 남다른 아우라가 있었다. 그리고 애니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 매력은 담임에게도 반 친구들에게도 통했다. 덕분에 애로사항이 많았던 나의 학교생활은 그녀의 등장과 함께 편해졌다. 모두 애니의 매력에 빠져들었듯 나도 점점 그녀에게 스며들었고, 결국 그녀를 아빠의 공식적인 연인으로 인정하게 되었으니 그 점에 대해 할 말은 없다.

바다 쪽으로 향해 난 창문을 통해 들어온 해 질 녘의 오렌지빛 햇살이 하얀 벽에 춤추듯 머물고 있다. 눈을 들어 먼바다를 바라보니 수평선 언저리가 주홍과 분홍빛으로 물들고 있다.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끝자락은 분홍을 품은 옅은 회색빛이다. 바다는 마치 푸르츠 칵테일을 바다에 던져 놓은 것처럼 조용히 흔들리고 있다. 엄마는 저 바다를 보며 날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바다를 보며 엄마가 그랬듯 하염없이 울었다. 바다가 참았던 나의 슬픔을 불러낸 것일까? 한동안 나는 소리 없이 흐느끼며 자존심 때문에 가둬놓았던 슬픔을 덜어냈다.

그 사이 바다는 달이 떨어지고 별이 담긴 짙은 잉크색으로 변해있었다. 그 바다는 아빠의 방에 걸려 있던 사진과 몹시 닮아 있었다. 혹시 아빠는 혼자서 지우펀에 왔던 것은 아닐까? 대체 아빠는 누구를 사랑한 것일까? 나는 벽에 걸린 영화 <남색 대문>의 포스터를 물끄러미 봤다.

눈 부신 햇살이 스치는 초록빛 숲을 배경으로 소년과 소녀가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포스터에 적힌 카피가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내 마음이 선명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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