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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연애에 물들다

타이베이, 상견니(想見你)

by Dear Lesileyuki

엄마는 창가에서 서서 시간을 주렴처럼 걸친 ‘세월나무’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엄마는 왜 말하지 않는 걸까? 아빠는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는 엄마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말해주어도 되지 않을까? 엄마는 지우펀의 홍등이 켜진 밤 같은 날들도 있었다 했다. 어두운 밤 붉은 마음을 담은 홍등 지켜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이곳에서 살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엄마의 바스러질 듯 야윈 어깨에서 쓸쓸함이 발치로 흘러내린다.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것처럼 가녀린 모습이 모딜리아니의 그림 속 여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가늘고 긴 몸매도 크고 몽환적인 눈빛과 섬세한 입술이 그랬다. 하늘거리는 민트색 바지에 목 가장자리가 늘어난, 오래되어 빛바랜 남색 티셔츠를 걸치고 흰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앞치마를 두른 모습조차 우아하다니 역시 과거의 발레리나 내공은 무시할 수가 없다. 달려가 한번 안아주고 싶었지만, 모녀의 인생에 깊이 새겨진 세월의 틈을 뛰어넘지 못한 어색함과 쑥스러움 때문에 진한 에스프레소를 듬뿍 적신 마들렌을 꿀꺽 삼켰다.

“마들렌이 맛있네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혼한 후 무작정 대만으로 와서 이곳에 정착한 이유는 저 나무 때문이었단다. 바람이 불던 날, 나무 앞에 앉아 있는데 마음이 편해졌지. 속삭이는 것 같았어. 마치 바람에 날려버리라는 듯이. 위로가 필요한 때였거든.”

엄마가 다가와 맞은편에 사뿐히 앉았다.

“엄마는 아빠를 어떻게 사랑하게 된 거야?”

“고등학교 때였지. 네 아빠랑은 예중 예고를 다닌 동창이야. 그냥 알던 친구였는데 초여름, 정확히는 5월 19일이었지. 연습실에서 춤을 추다가 그대로 바닥에 누워버렸어. 턴을 하다가 현기증이 나서 넘어졌거든. 문득 창문을 봤는데 붉은 장미가 오월의 햇살 아래 여왕처럼 당당하게 피어 있었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낭만 스프레이를 분사했는지 마음을 흔들더구나. 슬쩍 흔들기만 해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죽여주는 날씨였지. 바로 그때 전화가 왔지.”

엄마의 눈동자가 반짝이더니 웃음으로 가득 찬다.

“사랑하긴 했었구나.”

나는 웃으며 말했다.

“갑자기 나야, 하더니 너를 향해 달려가는 내 마음은 초여름의 바람보다 부드럽고, 햇살처럼 눈부시게 빛나고, 츄파춥스 콜라 맛 사탕보다도 달콤하다고 했지.”

“불량색소 많이 들어간 환타 멜론을 마시는 기분인데. 대단들 하셔. 그랬던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 중년의 이혼으로 결말을 내다니. 하긴 막 이혼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

“그래서 소녀가 물었지. 그럼 사귈래? 그러자 소년이 말하더구나. 그러고 싶어. 그래서 소녀는 천장을 보며 말했지. 좋아 그럼 지금 당장 학교 앞 맥도널드로 와. 그렇게 오월의 날씨가 사기를 치고 분위기를 잡는 바람에 사랑이 시작된 거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단 때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날이야. 그 이후의 모든 것을 상쇄시킬 만큼.”

엄마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입가에 지으며 말했다.

“그랬던 사랑이 왜 해피엔딩이 아니라 새드엔딩이었어?”

“왜 새드엔딩이라고 생각해? 합리적인 엔딩이야. 사랑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뿐이지.”

“그 사랑에서 나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구나.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들이네. 분명 전날 달걀을 박살 내며 달걀말이를 만들고 있던 엄마를 보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들렌을 잔뜩 구워 놓고 사라지고 없는 엄마나,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아빠나 그 시절 나에게는 최악이었어. 그러나 애들은 금방 잊어버리니까. 나 역시 예외는 아니더라고. 일진 애들 가방 들어주며 비굴하게 그럭저럭 살았지. 아빠가 어느 날 애니를 데리고 오던 날을 기억해. 아니다. 일방적으로 애니가 짠하고 나타났지. 이후 애니는 아빠와 나의 인생에 동의도 구하지 않고 종종 출몰했지. 아빠의 연인이고 조력자이며, 학교에서 내가 사고를 칠 때마다 담임에게 불려 오던 보호자, 였지. ”

“애니?”

엄마가 묘하게 웃으며 나를 봤다.

엄마는 애니를 알고 있었나? 그럴 리 없다. 애니는 엄마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아빠의 장례식날에도 엄마가 오던 날 일부러 그런 것처럼 온종일 자리를 비웠다. 대체 엄마는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걸까? 셋은 대체 무슨 관계일까?

“엄마 애니를 알아?”

“그러고 보니 보고 싶네. 장례식에서 볼 줄 알았는데.”

“엄마 보살이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으며 물었다.

"우린 한때 더할 나위 없는 친구였어, 애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지. 지금은 애니 일지 몰라도 나의 기억 속에는 ‘윤’으로 남아 있지.

아, 엄마가 기억하는 ‘윤’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아니 정확히 그 이름을 기억한다.

나는 엄마를 물끄러미 봤다. 순간 엄마에게서 북쪽 바다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깊고 슬프고 쓸쓸하며 허무한 그런 빛을 지닌 눈동자 말이다. 오래전에 봤던 그 눈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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