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Love
연애, 물들다.
나는 20대의 절반을 ‘사랑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보냈다.
그것은 정말 용감한 생각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그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그냥 사랑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형상이 하나도 없었다. 사랑은 그저 환상이며 풍경을 찍어 놓은 필름을 실수로 햇빛에 노출시키는 바람에 모두를 일순간 날려버리는, 찰나적인 것이라고 여겼다. 내가 봤던 영화 ‘러브스토리, 타이타닉, 사랑과 영혼....
물론 나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는 몇 번의 시뮬레이션이 있기는 했으나 문제는 언제나 지속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사랑하는 것이 귀찮았다. 사랑이 지는 것보다 내가 키우는 재스민꽃이 지는 것이 더 안타까운 시절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랑을 피워낼 자신이 없었다. 내게 사랑은 눅진한 누가크래커였다.
나를 스쳐 지나가 남자들에게서 필연이라는 운명의 향기를 맡아보지 못했다. 아마 나는 그때 사랑은 분명 불가리안 장미처럼 향기가 날거리 생각을 했었나 보다. 그래서 괜찮은 사람을 엄마 말처럼 죄다 놓쳤는지도 모른다. 인정한다. 지나치게 낭만을 강조하는 바람에 평범하게 다가 온, 함께 살아도 괜찮은 사랑을 모두 놓쳐버렸다는 것을.
얼마 전 결혼한 친구의 집들이에 갔다가 화제가 된 이야기가 있다. 결혼 안 하고 살려면 최소한 10가지 이상의 음식 레시피는 알아야 하고 요일마다 바꿔서 만날 수 있는 남자를 포함한 친구가 7명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핸드폰에 깔린 배달앱이 의식주를 다 해결해 주기 때문에 레시피는 필요 없고 친구도 일주일 내내 만나줄 수 있는 단 한 명의 친구가 있기에 7명까지 필요 없다.
그 단 한 명의 친구는 바로 시인 지망생 이준이다. 그는 아마도 일찌감치 각서를 써준 죄로 십 수년을 내 곁에서 맴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남자친구라기보다는 허물없는 초등학교 동창생 정도의 감정을 느낄 뿐이다. 그와 나 사이에는 일말의 로맨틱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그와 나 사이에는 절대 전기가 통할 수 없는 부도체가 깔린 듯한 느낌이다.
그가 내게 각서를 써준 이유, 엄밀히 말하자면 그와 그의 부모님이 엄마에게 각서를 써준 이유는 온전히 어린애 장난이 부른 유치한 사고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와 내가 짝이 되면서 발생했다. 곱상한 이준은 소심하고 키가 작았다. 반면 덩치가 크고 극성스러웠던 나는 병약해 보이고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이준이 맘에 몹시 맘에 안 들었다. 책상에 줄 긋고, 넘어오면 사정없이 샤프로 내려찍어버리고, 키 작다고 공개 망신 주는 게 예사였던 나의 횡포에 대한 보복으로 그는 어느 날 중차대하고 그로서는 평소엔 상상도 못 할 엉뚱한 사건을 일으켰다.
그 사건이란 다름 아니라 애들 사이에서 한참 유행하던 똥침 주기였는데, 문제는 이준이 의자사이에 연필을 교묘하게 끼워 놓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연필은 그가 미술학원에서 쓰는 연필이었기에 범인이 누구인지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체육 수업이 끝난 후 수선스럽게 앉던 나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아픔에 기절할 것 같아서 멍하니 이준을 바라보다 기절했다. 그 아픔은 처음 경험해 보는 종류의 아픔이었다. 그럼에도 울음을 터트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준이었고 선생님은 119를 부를 경황도 없이 나를 들쳐없고 아파트 단지 내 있는 한사랑 산부인과로 달렸다. 몽롱한 가운데 울면서 쫓아오는 이준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