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금 그래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건 나에게 암 진단을 내렸던 대학병원의 이비인후과 교수님 덕이었다.
여러 검사 끝에 호지킨림프종으로 보인다며 혈액종양내과로 연결해준다는 말씀을 하시던 날,
보호자로 왔던 엄마는 걱정이 많이 됐는지 이것저것 급히 여쭤보기 시작했다.
"수술도 해야 하나요?"
"치료는 많이 힘든가요?"
"완치는 잘 되나요?"
그 모든 질문에 단호하게 답하던 교수님.
"제 전문 분야가 아니라 잘 알지 못합니다. 혈액종양내과 교수님께서 잘 신경 써주실 겁니다."
전문가의 권위가 더해진 말의 무게를 잘 아시는 분 같았다.
괜찮을 거라는, 잘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 섞인 말씀은 일절 하지 않으셨다.
당장 나와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혹은 모른겠다는 말이 본인의 신뢰감을 떨어뜨리진 않을까를 걱정해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었을 텐데, 대신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을 택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런 교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모르는 것은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모르는 건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하기'
당연한 말이지만 의외로 일을 하다보면 유혹이 생긴다.
예전에도 한 번 썼던 내용인데,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에는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는데, 이 때문에 비전문가는 전문가의 말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러다보니 비전문가는 해당 전문가에게서 느껴지는 '신뢰감'이라는 주관적인 감정을 통해 사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잘 모르는 내용을 둘러서 말하고 있는지를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전문가에게 아주 중요한 무형의 요소 중 하나가 이 신뢰감이라 생각하는데, 그러다보니 간혹 신뢰감을 잃을까 하는 걱정에 자세히 알지 못하는 내용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처럼 얘기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도 약사로서 그런 유혹들을 늘 경계하면서, 스스로에게 더 엄격해져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2.
그렇게 내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질문들이 조금씩 쌓여가다 보니, 크게 세 종류 정도로 분류할 수 있었다.
1) 마땅히 알아야할 내용이지만 알지 못했던 내용
2) 반드시 알아야할 내용은 아니지만, 알고 있다면 내 자산이 되는 내용
3) 몰라도 하등 상관 없는, 전공(약학)과 접점이 거의 없는 내용
아래부터 얘기하자면,
3)은 그냥 그 순간 모르겠다고 하고 넘어가도 상관 없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주변의 다른 시설의 위치나 교통편에 대한 질문들.
알면 답해주면 되지만, 모른다고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는 내용들이다.
2)의 경우가 가장 광범위하다.
약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초과학, 의학, 영양학 등의 학문부터 보건의료와 관련된 국가 정책, 복지 등 약사로서 반드시 알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닐 테고 모른다고 부끄러워할 필요까진 없는 부분이지만, 알아두면 나에게 큰 자산이 되는 내용들이다.
의료진과 손님(환자) 양측과의 소통 모두 원할해지고, 특히 손님들에겐 굳이 나를 찾게 될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국제정세도 도움이 된다.
재작년 무렵엔 Clavulanate라는 성분이 들어간 항생제 건조시럽이 품절된 적이 있는데, 가장 큰 생산량을 담당하고 있던 유럽의 어느 국가에 큰 홍수가 나서 약을 생산하는 공장에도 피해를 입혔고, 이로 인해 수급에 차질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에 우황청심원의 가격이 급등했는데, 러시아에서 수입해오던 사향노루의 사향을 수급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똑같이 약이 없다, 비싸다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이 내용을 함께 얘기할 수 있냐 없냐가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 여기에 해당하는 질문을 대답하지 못했을 땐,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지만 더 찾아보고 더 공부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마지막 1)이 처음에 얘기했던, 아는 척 대답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질문들이다.
약사로서 마땅히 알아야하는 부분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는 게 한 가지,
정보 격차 때문에 내가 올바른 답을 하고 있는지 듣는 사람이 판단하긴 어렵다는 게 또 한 가지 이유다.
그렇지만 나의 말이 환자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늘 생각해야 하고,
아주 가끔은 그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늘 인지해야 한다.
그러니 말 한 마디라도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면서 솔직하게 모르는 건 잘 모르겠다고 해야한다.
물론 약학이라는 학문이 양은 방대하면서도 반감기는 짧은 학문이라,
모든 걸 다 알긴 현실적으로 어렵고 어제까지 맞았던 내용이 오늘 갑자기 틀린 내용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잘 알지 못함을 부끄러워는 해야하며 솔직하게 고백도 할 수 있어야한다.
그 결과 돌아오는 말이 '어떻게 약사가 이런 것도 모르냐'는 환자의 불만이라 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느끼며 채워나가야 한다.
그 말이 두려워서, 신뢰감을 잃는 게 두려워서 피하기 시작하면, 역설적으로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신뢰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경험이 더 쌓이고 이룬 게 더 많아지더라도, 그래서 잃을 게 더 많아지더라도, 모르는 건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다.
마땅히 알아야하는 걸 몰랐을 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지적으로 나태해지지 않고 성장해가는 사람이고 싶다.
그게 평생 내가 이 일을 대하는 태도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