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는다는 것

by 아피탄트

1.

3년 전, 내가 1년차일 때였다.

깨지고 단단해지기를 반복하며 일에 적응해가던 가을의 어느날, 노년의 여성 한 분이 처방전을 들고 약국을 방문하셨다.


- Choline alfoscerate 400mg, 1일 2회 60일


뇌 인지 기능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진(지금은 효능에 논란이 있지만) 전문의약품으로, 당시 근처 병원에서 치매 초기에 처방하던 약이었다.

처방전을 받고 약을 준비해서 투약대로 나왔는데, 그 분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을 다녀오시는 건가 싶어 약을 한 쪽에 치워놓고 기다렸다.

그런데 한 30분 정도 지난 후, 그 분이 다시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오셨다.

뭔가 이상해서 보니 30분 전과 같은 약이 기입된 처방전이었다.


"음...같은 처방전을 이미 제출하셨고, 저희가 약도 준비해뒀어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알고보니 본인이 처방전을 제출하셨다는 사실을 잊고, 다시 병원에 가서 처방전을 재발급받아 오신 거였다.

그 사정을 알게 되니 마음이 참 무거웠다.

천천히 나빠질 순 있어도 더 좋아질 순 없는 질병이니, 매일 오늘이 가장 정신이 건강한 날이다.

속상하지만 그런 일들이 더 잦아질 테지.


그리고 그의 맞은 편엔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약 잘 챙겨드시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밖에 없는 내가 있었다.

약사로 일 하면서 가장 큰 무력감을 느낀 날이었다.

나의 의지나 능력과는 무관하게 바꿀 수 없는 일들이,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존재했고, 그 앞에 선 나는 너무 작은 사람이었다.



2.

그 해 겨울이었다.

이번엔 어느 노년의 부부가 처방전 한 장씩을 들고 약국을 방문하셨다.


할머니 - Donepezil 5mg

할아버지 - Donepezil 10mg


치매에 가장 빈번하게 처방되는 약이다.

용량이 낮은 할머니는 비교적 경도의 치매를, 용량이 높은 할아버지는 중등도 이상의 치매를 앓고 계셨다.


치매의 증상은 다양하게 발현이 되는데, 사회의 규범을 인식하는 뇌 기능이 손상된 경우 도벽이나 폭력성으로 그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 할아버지는 손에 잡히는 이것 저것을 다 주머니에 넣으려하시는 분이었다.

본인이 뭘 주머니에 넣는 것인지도 인지하지 못 한 채로.


그의 옆엔 온 약국을 헤집고 다니는 할아버지를 말리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러다보니 할아버지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었고, 이내 할아버지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셨고, 할머니는 또 그를 잡으려 따라 나섰다.

할머니도 완전히 건강하신 건 아니었으니, 덜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을 돌봐야하는 상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할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다시 진열된 품목들에 손을 대시기 시작했다.

걱정 반 인내 반으로 지켜보다 푸룬주스의 뚜껑을 따서 마시는 순간, 이젠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러면 돌아가시는 길에 설사할 수도 있는데.'


성인 남성을 말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 분이라 언성도 높여야했다.

게다가 그런 모습이 기다리고 있는 다른 손님들에겐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도 신경쓰였다.

어쨌든 긴 설득 끝에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고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사히 귀가하셨다.


그런 할아버지에게도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는 기억이 있었다.

본인의 이름, 자녀의 전화번호, 그리고 배우자의 존재.

도저히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거 같아 자녀 분에게 도움을 청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할아버지는 자녀의 전화번호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덕분에 연락이 닿았고, 상황이 더 원할하게 해결되었다.

할아버지는 또 할머니와 그렇게 다투시면서도, 이 사람이 내 배우자라는 사실마저 잊지는 않으셨다.

결국엔 할아버지를 멈춰 세운 것도 내가 아니라 할머니였으니, 누굴 더 특별하게 생각하고 누구에게 더 반응하는 지는 아주 명확했다.

할아버지에겐 그들이 어떤 존재였길래 흐릿해져가는 기억 속에서도 끝까지 붙잡아두게 되었을까.


그리고 본인도 점점 상태가 나빠져가는 건 인지하지 못 한 채로, 배우자가 점점 더 악화되는 모습을 지켜만 봐야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감히 어떤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돌보시는 걸까,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3.

그런 무기력함의 연속에서 한 가지 생각한 것이 있다.

적어도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보단 내가 오래 더 그들을 기억하고 싶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고, 그래서 나를 낯설어 해도 괜찮다.


나를 잊어가는 그들을 보며 수많은 무력감을 느끼더라도, 그들이 반대로 나를 보며 그런 감정을 느끼진 않았으면 좋겠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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