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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농 Nov 06. 2021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현재 속해 있는 원내생 진료실에서 일하다 보면 구환이 아닌 신환을 주로 본다. 낯선 치과에 처음 방문한 신환이 접수를 마치고 원내생 진료실에 들어오면, 우리들은 어떤 점이 불편해서 방문하였는지 꼭 묻는다. 처음 본 환자들로부터 '어금니가 시려요.' '잇몸이 욱신거려요.' 등 다채로운 불편사항들을 듣고 나면 그 내용들을 토대로 구강검진을 시작한다. 이처럼 구강검진은 '외부인과 치과의사'라는 관계가 '환자와 치과의사'로 바뀌는 순간에 이뤄지는 치과식 첫인사인 셈이다. 이 첫인사는 향후 환자를 계속 내원하게 만드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원내생들이 정식 치과의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크던 작던 내재된 불신을 가지고 방문을 한다. 그렇기에 첫 만남인 구강검진에서 전문적인 첫인상을 남기는 것은 필수다. 여러 환자들을 만나다 보니 상황에 따른 몇 가지 첫인상 필살기가 생겼는데 그중 하나를 소개해보겠다. 

 환자의 입 안에 빛을 비춰보면 가끔 볼 쪽 점막에 흰 선이 씹는 면을 따라 쭉 그어져 있는 경우가 있다.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면 밑에  첨부한 사진을 보면 된다. 치의학 용어로는 이것을 linea alba라고 부르는데, 구강검진을 하다가 linea alba를 가지고 있는 환자를 만나면 EBS 명의에 나온 선생님들처럼 나긋한 톤으로 환자에게 질문을 한다.  

 "환자분, 평소에 이를 꽉 깨무는 습관이 있으신가요?" 

 필살기 발동이다. 이 말을 들은 환자 중 절반은 어떻게 알았냐고 놀라시고, 나머지 절반은 두세 번째 병원에 왔을 때 생각해보니 자신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무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며 놀라신다. 이렇듯 환자가 말하지 않은 사실이나 인식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이야기하면 구강검진에서 나의 첫인상은 대성공이다. 


스트레스받을 때나 집중할 때 이를 꽉 깨무는 버릇이 있다면 당신의 입안에도 분명 linea alba 즉 하얀 선이 있을 것이다.


 다시 입 안으로 돌아와 보자. 앞서 이야기했듯이 linea alba는 이를 꽉 물어서 볼에 치아 자국이 남은 것이다. '내 입에도 설마 있겠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텐데 논문에 따르면 10명 중 1명 꼴로 존재한다고 보고됐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를 꽉 깨물까? 그리고 linea alba가 오랜 시간 사라지지 않으면 구강암 같은 무서운 질병으로 변할 가능성도 있을까? 첫 번째 질문부터 답해보자면 이를 꽉 깨무는 근본적인 이유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를 꽉 문다. 낮 시간에는 주로 업무에 집중할 때 그리고 운동할 때 이를 꽉 물고, 밤 시간에는 오늘 하루의 피곤함과 내일의 긴장감 때문에 잠자는 와중에도 이를 꽉 문다. 

 자, 첫 번째 질문에는 어느 정도 답이 된 것 같고, 이제 구강암과 같은 위험한 질병으로 변할 수 있느냐는 두 번째 질문의 답이 궁금할 텐데, 다행히도 linea alba는 정상 범주에 속하고 구강암으로 변할 가능성은 0%다. 따라서 결론은 입안에 linea alba가 있어도 당장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당장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 전혀 걱정할 게 없다는 뜻은 아니다.  이를 꽉 무는 습관이 오래도록 지속되면 치아머리부터 금이 가기 시작한다. 만약 치아 뿌리까지 금이 심하게 가면 그 치아로 무언가를 씹을 때마다 굉장한 통증이 동반된다. 이 통증을 저작통이라고 부르는데,  뿌리까지 금이 가서 발생하는 저작통을 해결하는 치료법은 단 하나다. '발치' 밖에는 답이 없다. 그래서 나는 환자들에게 무릎 관절처럼 치아도 소모재라고 강조한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부디 자신의 치아들을 소중히 다뤄주길 바란다. 

 

 자매품으로 감정 역시 소비재다. 감정은 지우개처럼 너무 많이 쓰다 보면 닳아 없어질 수 있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번 아웃 신드롬이 이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철이 빨리든 어린 마농은 감정이 소비재라는 것을 깨달은 뒤 중학교 어린 시절 한 가지 좌우명을 세웠다. 

 '걱정한다고 바뀌는 일이 아니라면 신경 쓰지 말자고. 또한 걱정될 일을 만든 대상에게 분노해서 바뀔 게 없다면 화내지 말자고.'

 이 말을 들은 누군가 나를 향해 말이 쉽지 그걸 실천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비교적 잘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면, 금니 치료를 진행하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워 치료에 필요한 기공물과 보고서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모든 걸 마치고 환자가 오면 되는 상황에서, 갑자기 환자에게 전화가 왔다. 

 "근처 병원에서 싸게 해 주신다고 해서 미안하지만 앞으로 못 갈 것 같습니다."

 뭐, 괜찮았다. '나도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민폐를 끼친 적이 한 번은 있었겠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가장 최근에는 사촌동생이 말썽을 피운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제시한 치료 마감일까지 이주일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아직도 아말감 치료를 진행할 환자를 구하지 못했다. 지금껏 작성한 모든 차트를 뒤지며 아말감 치료를 할만한 환자를 물색하던 중 사촌동생이 레이더 망에 포착됐다. 그래서 사촌동생에게 제발 와달라고 사정하며 겨우 병원 예약까지 잡아뒀는데, 당일 날 노쇼를 당했다. 졸업을 못하고 본과 4학년을 한 번 더 할 수도 있는 아찔한 상황에 봉착했지만 사촌동생을 향해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나도 20대 초반에 아침잠에 취해서 가야 할 곳에 가지 못한 경험이 있으니까. 

 안 좋은 결과가 닥쳐도 툴툴 털고 일어나는 나의 모습들을 비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 있으니 바로 여자 친구다. 그녀는 나에게 멘탈이 좋다며 이럴 때는 '으른' 같다고 한다. 참고로 여자 친구는 나보다 연상이다. 하지만 이런 낙천적인 성격을 가졌음에도, 나에게 염려가 차고 넘치는 분야가 있으니 바로 건강이다.


 나의 건강 챙기기 이력은 동 나이대 남성들에 비해 화려하다. 우선 건강을 위해 술과 액상과당이 들어간 음료는 마시지 않는다. 오로지 물만 마시는데, 물도 하루에 3리터 이상을 마신다. 또한 나트륨 섭취를 줄이기 위해라면은 섭취하지 않으며, 찌개를 먹어야 할 자리에서는 수저를 사용하지 않고 젓가락을 이용해 건더기만 건져 먹는다. 또한 가공육을 먹을 때는 뜨거운 물에 몇 분 데친 후 먹는다. 운동도 몇 년째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헬스장에 가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매주 일요일 저녁에는 홍제천에서 한강까지 10킬로 정도를 달린다. 약간은 강박적으로 건강을 관리하는 나에게 건강염려증이 휘몰아쳐 온 때가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2019년 12월, 치과대학 본과 2학년이었던 나는 2주 간의 기말고사 시험기간 동안 매일 하나 또는 두 개의 시험을 치러야 했다. 하나 또는 두 개의 시험과목이라면 부담이 적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치의학과 특성상 외워야 할 것이 산더미이기에 밤새서 아침에 시험을 보고, 3-4시간 쪽잠을 잔 후 그 다음날 시험을 위해 밤을 새는 짓을 2주 간 해야 했다. 첫 주차에는 어떻게 버텨도 둘째 주가 되면 대부분의 동기들은 타이어가 터진 자동차처럼 덜덜거리며 시험을 준비한다.


 아마 기말고사 첫째 주 수요일쯤이었다. 그날 시험을 썩 잘 보지 못해 다음 시험공부에 박차를 가하던 새벽 2시쯤 갑자기 왼쪽 가슴을 누군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다.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아파서 펜을 급하게 내려놓고 가슴을 부여잡은 채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30초 정도가 지나니 통증은 사라졌다. 참으로 어리석은 게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한밤중이어도 병원을 가야 하는 게 옳은 것이지만 당장 내일 닥칠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번 일을 넘기고 다시 의자에 앉아 공부를 시작했다. 

 그다음 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만 이틀 후인 금요일이 되었을 때 다시 한번 심장이 아파왔다. 그러던 중 문득 나의 심장에 관한 과거력이 떠올랐다. 너무 어릴 적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부모님께 전해 듣기로 6살 어린 마농이는 혈소판 감소증을 이유로 병원에 입원한 이력이 있었다. 본과 2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전신질환에 대해 정확히 배우지 않을 때여서 지금 심장이 아픈 것과 과거의 혈소판 감소증이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수업시간에 협심증이라는 말을 주워 들어서 현재 나의 심장이 아픈 이유가 협심증 때문은 아닌가 의심 꽃이 피기 시작했다. 원래 의심 꽃은 한번 피면 곰팡이처럼 사방 군데 빠르게 번지기에 그때부터 나는 이미 협심증 환자였다. 그때부터 2주간의 시험이 끝날 때까지 '사즉생 생즉사'를 속으로 외치며 쓸데없는 영웅의식에 젖어들었다. 

 

 2주 간의 기말고사를 모두 끝내고 곧바로 학교 근처 큰 내과병원에 찾아갔다. 가는 길에 어머니께 전화를 걸어 심장이 아파 병원에 진찰받으러 간다고 이야기했다. 아버지께는 말씀드리지 말아 달라고 덧붙였다. 아버지께서 아시면 깜짝 놀라 당장 서울로 올라오시거나 군산에 내려와 대학 병원에 가자고 하셨을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리액션이 적은 어머니께만 넌지시 말씀드렸다. 그때의 심정은 다소 비장했다. 20대에 협심증이 오면 평균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도 구글에서 찾아봤기 때문이다.

 어머니와의 전화를 마치고 병원에 도착 후 진찰 전 혈압을 측정했는데 수축기 혈압이 150mmHg가 넘었다. 

 '정말 협심증에 걸린 것일까? 앞으로 평생 약을 먹으면서 살아야 할 운명인가?'

 그렇게 정신적으로는 이미 협심증 환자가 되어 의사 선생님 방에 들어간다. 




  5분 후, 진료는 모두 끝났다. 걱정하고 계실 어머니께 연락을 한다.

 "엄마, 그....."

 "아들, 병원에서는 뭐라고 그래?"

 어머니의 근심 섞인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린다. 나는 한참을 뜸 들인다.

 "어서 말해봐! 뭐라고 그래?"  

 어머니가 재촉하자 나는 마지못해 기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역류성 식도염 때문에 그렇고 심장은 아무 이상이 없대!"


 (5분 전)

 70대처럼 보이는 남성 분이 의사 선생님 방에서 나오고 곧바로 내가 들어간다. 젊은 애가 심장내과에는 왜 왔나 싶으셨는지 의사 선생님은 갸우뚱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걷거나 뛰고 나서 심장이 아팠는지, 통증이 방사형으로 퍼지는지, 가족 중에 심장 질환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등을 확인하셨다. 방금 질문들에 대한 나의 답은 모두 '아니요'였다. 의사 선생님이 미간을 한번 찌푸리시더니 시험이 막 끝나서 쾡한 나의 얼굴을 보고 학생이냐고 물어보신다. 학생이라도 대답을 하자 최근에 스트레스받거나 잠을 깨려고 커피를 잔뜩 마신 적이 있는지 되물으셨다. 내 기억에는 2주 동안 하루에 3-4시간 정도를 잤다. 그리고 카페인 섭취 루틴은 새벽 1시에 한 번, 오전 7시에 한 번 하루에 총 2번을 마셨다. 그리고 밥을 먹고서는 졸음이 쏟아져서 침대에 누워 30분씩 잠을 잤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자 심장이 아니라 위가 약해져서 역류성 식도염이 걸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혈압이 높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때 이후로 커피는 웬만하면 마시지 않게 되었고, 너무 마시고 싶다면 디카페인 커피를 선택하게 됐다. 이 스토리를 약사 출신인 여자 친구에게 말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고 한참을 웃었다. 협심증 기본 증상도 뭔지 모르면서 어떻게 협심증일 것이라 생각했느냐고 말이다. 속으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웃긴 일이다. 누군가 어떤 일에 대해 스트레스받고 힘들어할 때마다 아무 염려하지 말고,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자고 이야기한 사람 치고는 다소 소란스러운 2019년 겨울을 보냈기 때문이다. 

 2021년 말, 이렇게 창피한 과거가 생각날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여전히 앞서 말한 감정에 대한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이미 벌어져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신경 쓰지 말자.' 다시 한번 이 다짐을 하며 형광등을 끄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모든 번뇌는 내려놓고 잠에 처한다.




 갑자기 눈이 번뜩 떠진다. 

 '아! 내가 오늘 비타민 B를 챙겨 먹었던가?'

 침대에서 다시 일어나 불을 켜고 입안에 비타민 한 알을 털어 넣는다. 아무래도 신조를 바꿔야겠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건강에만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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