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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농 Nov 19. 2021

양치질 좀 "덜" 할걸. (1/2)

작전명 : 여자 친구 무사 졸업.

바쁘게 진료실로 들어가는 여자 친구 뒤꽁무니를 쫄랑쫄랑 따라간다.   

"오늘은 어떤 분이셔?"

"삼촌의 장모님!"

멀기도 하다는 생각이 끝나자마자 불현듯 이 상황이 데자뷰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지난 번은 누구셨더라?"

"OO중학교 야간 경비원 선생님이랑, 그리고... 맞다! 학교 도서관 사서로 계신 선생님 딸!"

참고로 OO중학교는 여자 친구의 어머님이 교편을 잡고 계신 곳이다. 잠깐 멈춰서 이러다가 상견례도 하기 전에 여자 친구의 사돈의 팔촌까지 뵙는 건 아닌가 상상을 한다. 머리카락을 찰랑이면서 부지런히 진료실로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지난날 나의 올바르고 성실했던 양치 습관을 되돌아본다. 후회가 막심하다.

 정신을 차리니 여자 친구는 저만치 앞서간다.

"같이 가!"


 "흠.. 이거 충치치료 해야겠는데요? 충치 제거하다가 깊어지면 신경치료까지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라고 환자들에게 상황설명을 하면 10명 중 8명의 단골 반응은  "하... 양치질 좀 잘할걸"이다. 사람은 실수를 통해 배운다지만, 양치를 제대로 못한 대가는 여러모로 치명적이다. 우선 시간적으로 손해다. 병원을 오고 가야 하며, 치과에서의 대기시간은 물론이고, 입을 벌리고 진료받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삶의 질 하락도 한몫한다. 달거나 찬 음식을 먹을 때마다 바짝 긴장해야 하며, 특유의 3~5초 정도 시린 느낌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게 한다. 그것뿐이겠는가? 잇몸이 욱신거리면 치아들이 붕 떠있는 느낌이 들고, 양치할 때마다 비린 피 맛을 느껴야 한다. 마지막으로 뭐니 뭐니 해도 치과치료로 얇아지는 지갑 사정을 보고 있자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양치질은 열심히 그리고 잘해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그런데 양치질을 잘 한걸 뿌듯해하지는 못할 망정 후회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 커플의 평화와 미래를 위한 관점에서 성실한 양치질은 지난날의 과오요, 근시안적 어리석음이었다.


 '양치질 좀 덜 할 걸'이라는 말도 안 되는 후회를 이해하려면 우선 치과대학의 악명 높은 졸업 시스템을 먼저 알아야 한다. 국내 11개 치과대학 중 우리 대학이 특히 까탈스러운 졸업 조건을 내세우기로 유명하다. 치과대학의 졸업과정은 다소 소년만화 재질인데, 4년 간의 대장정 중 전반부에 해당하는 2년은 주로 뛰어난 스승들 밑에서 피땀 흘려가며 다양한 기술을 연마하는 기간이다. 피땀 흘린다는 표현을 보통 관용구처럼 쓰는데, 불을 써야 하는 환경에서 날카로운 기구를 다루는 일이 많기에 실제로 많은 친구들이 땀 벅벅 상태에서 피를 흘린다. 피와 땀이 뒤섞였으니 피땀 흘린다는 표현이 그리 과장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샤봉디 제도에서 2년 후에 재회하는 원피스 만화 주인공들처럼 갈고닦은 실력으로 후반부 스토리에 입장한다. 마음 같아서는 만화 주인공들처럼 능숙한 실력과 농익은 외모로 후반부를 시작하고 싶지만, 현실은 임상경험 부족으로 이론만 빠삭한 반쪽짜리 실력과 밤샘 스트레스 때문에 너무나 푹익은 외모로 모험을 떠나게 된다. 후반부 모험은 전반부보다 좀 더 다이나믹한데 전형적인 소년만화의 클리셰인 실패의 눈물, 귀인과의 만남, 드라마틱한 난관 극복 요소들은 스토리 곳곳에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로맨스 장르도 추가하여 두 인물의 세계관을 합쳐 새로운 이야기를 써갈 수도 있다.

 후반부 모험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각 과별로 우리에게 기간 내에 해야 할 미션을 준다. 예를 들어 보철과에서는 크라운은 3개 이상과 틀니 한 악궁 이상 직접 제작하여 끼워드려야 한다는 조건을, 소아치과에서는 16세 미만 소아 환자의 치아 홈메우기를, 외과에서는 사랑니 발치 10개 이상을 졸업요건으로 걸어놓는다. 아직 이야기하지 못한 미션들이 많은데, 이러한 졸업요건을 정리해둔 책자는 50페이지 정도가 될 정도로 두껍고, 다단계 회사처럼 졸업까지 어떤 진료를 얼마나 많이 해야 되는지 목표 달성률을 계산해주는 엑셀 차트 표도 존재한다.


꽤나 디테일한 표다. 이름은 다 가렸고, 이 글을 쓰는 졸업이 2주일 남은 시점에서 나의 졸업 당성률은 92.62%이다.


 이 많은 미션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다양한 연령대의 환자가 필요한데, 그렇다면 환자들은 어디에서 데려와야 할까? 틀니 환자 같은 경우는 후원단체를 통해 각자 1명씩 매칭 되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은 직접 구해와야 한다. 그래서 보통 막역한 친구부터 시작하여 몇 년간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들까지 연락을 돌린다. 만만한 동아리 후배들도 부르고, 실력이 좀 쌓이면 형제자매와 부모님 그리고 일가친척까지 아쉬운 소리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치과 체어에 앉힌다. 나중에 치과를 개원하면 결국은 영업이라고들 하는데, 그런 능력까지 배양해주려는 학교의 교육 철학인가 싶기도 하다.

 외향형인 여자 친구에 비해 내향적인 나는 주변에 친구가 많지도 않고, 지방에서 홀로 상경해왔기에 서울에 사는 친척들도 거의 없다. 참말로 축복인 게 소심한 성격을 지녔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은 아니어서 환자가 구해지면 구해지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속 좋게 학교생활을 했다. 반면 여자 친구는 친구 관계가 넓고 깊으며, 서울에 거주 중인 가족들도 많아 환자 수급상황이 훨씬 좋았지만, 자신이 필요한 케이스가 구해지지 않으면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로맨스 장르를 추가하면 서로의 세계관이 합쳐진다. 마블 유니버스처럼 우리 커플만의 유니버스가 탄생하는데 그 순간부터 여자 친구의 역경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여자 친구의 졸업을 가로막은 악당은 다름이 아닌 신경치료였는데, 사랑니와는 다르게 누구에게 신경 치료할 치아가 있는지 입안을 보고 검사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으니 끊임없이 새로운 환자를 불러야 했다. 몇십 명의 입안을 샅샅이 뒤져도 신경 치료할 치아를 찾지 못한 여자 친구는 모든 인적 네트워크를 동하여 아버님의 고교 동창, 삼촌의 장모님, 어머니의 직장동료 자제분들까지 진료실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경치료가 구해지지 않아 우울감에 빠지는 여자 친구를 보며

'아! 내가 양치를 덜 해서 이가 많이 썩었더라면 여자 친구가 신경치료로 고통받지 않았을 텐데, 너무나 통탄스럽다'

라는 허무맹랑한 상상까지 시작하게 되었다. 여자 친구가 신경치료 케이스를 채우지 못해 졸업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주변 동기들에게도 퍼지게 되자, 혼수로 충치를 만들어 신경치료를 받으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목소리도 듣게 되었다.  

 

"카톡"

 신경치료를 담당하는 보존과에서 공지가 올라왔다.

"기준 완화는 힘들며 기준 미달 시 인원수에 관계없이 F학점 나갈 겁니다. 임상 마감 전까지 반드시 케이스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졸업까지 D-30. 여자 친구가 위험하다. '작전명: 여자 친구 무사 졸업' 본격 가동한다.


- 양치 좀 덜 할걸 (2/2)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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