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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농 Nov 28. 2021

양치질 좀 '덜' 할걸. (2/2)

작전명: 여자 친구 무사 졸업.

 여자 친구와 재밌는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리며 웃다가 "딱" 소리가 난다.

 유독 뻐드러진 나의 앞니가 여자 친구의 머리에 부딪친 것이다. 살짝 치아가 먹먹하지만 기분 좋게 웃긴 이야기를 이어가려는 찰나에,

"한번 더 부딪히면 치아에 트라우마가 가해져서 치수 괴사로 네꺼 치아 신경 치료할 수 있지 않을까?"

맞다. 기억났다. 아직 여자 친구는 신경치료 케이스를 채우지 못했다.


 여자 친구의 친한 친구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친구가 묘사한 여자 친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병에 걸리는 사람'이었다. 동의한다. 살면서 이토록 부지런한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매사에 최선을 다한다. 자랑을 좀 하자면, 그녀는 약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치대에 다시 입학했는데 여기에서도 최상위권 성적이다. 그리고 약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던 것들이 아까울뿐더러, 용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대학병원 파트타임 약사로 일한다. 워커홀릭도 이런 워커홀릭이 없다.

 과제를 할 때에도 남들과 사뭇 다르다. 금주 목요일 자정까지 제출하라고 한 월요일 숙제를 당일 날 완성해서 제출한다. 물론 나도 월요일에 제출할 때가 있긴 하다. 그녀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주로 과제가 있다는 것을 망각했다가 뒤늦게 그다음 주 월요일에  제출한 경우이긴 하다. 이렇듯 그녀는 마감기한을 여유롭게 두고 일처리를 하는 사람이기에 웃긴 이야기를 하다가도 갑자기 끝내지 못한 신경치료를 떠올리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자 친구는 나보다 산술적으로 1.5배 더 많은 시간을 환자 진료에 쏟았지만, 신경치료 환자를 아직까지도 찾지 못했다. 다행 중 불행인 건 나는 환자 운이 있어서 일찌감치 신경치료 케이스를 모두 채웠다는 점이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먼저 끝내 놨으니 좋은 것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면 당신은 아쉽게도 우리 커플의 CC 유니버스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소년만화 재질인 우리 커플의 모험은 공유 세계관을 가져서 한쪽에 짙은 먹구름이 끼면, 다른 한쪽 세계관 장르에도 디스토피아 기운이 스멀스멀 퍼진다. 이때쯤이면 '귀인의 등장'과 '극적인 해결' 시나리오가 나와야 할 타이밍인데, 최종화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난관 봉착' 이후로 스토리 전개가 안되고 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만화 속 주인공들이 어느 날 운명에 이끌려 세상을 구하는 것처럼, 최종화에 담길 내용은 나의 도움으로 그녀가 환란으로부터 벗어나는 스토리인가 보다. 그렇다면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우선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 신경치료 케이스가 없는 이유에 대해 먼저 파악해야 한다. 우리는 카페 책상에 마주 앉아 진지하게 토의를 했고, 여자 친구의 손기술이 타 동기들에 비해 너무 뛰어난 것이 문제라는 다소 의외의 결론을 얻었다. 일례로 여자 친구가 치과치료를 마치고 슈퍼바이저 교수님께 검사를 받으면 교수님들이 하나 같이 놀라신다.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고 신속한 치료를 해서다. 가끔 옆에서 보고 있자면 이게 과연 학생 신분에서 가질 수 있는 실력인가 싶기도 하다. 교수님들 사이에서 에이스로 소문난 여자 친구는 내가 했으면 신경이 노출될 만한 상황에서도, 미세한 움직임으로 신경을 건드리지 않고 충치치료를 마무리한다. 지금껏 신경치료를 했어도 미안하지 않을 상황에서 어떻게든 맡은 바 소임을 다해 치아를 살려냈던 것이다. 이렇듯 아슬아슬했던 치아들을 모두 구원해버리니 신경치료 케이스가 있을 리 만무하다.

 "환자가 원하고 교수님이 동의하신다면, 공격적으로 신경치료를 해주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어!"

 여자 친구를 설득하는 작전인 플랜 A를 시작했는데,

"신경치료에 양심을 팔 순 없어!"

 여자 친구가 버럭 외친다. 아쉬움이 남지만,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봐온 소년만화 주인공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정도(正道)를 걸었다. 마찬가지로 CC 유니버스 속에서 역경을 겪고 있는 그녀 역시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의 일관성을 보여줄 것이라 알게 모르게 기대했나 보다. 대화를 마친 후 너의 진심 잘 알겠다고 이야기하고 나의 비장의 카드, 플랜 B를 가동한다.


 우리가 속해있는 원내생 진료실은 책임감을 가지고 진료에 임하라는 의미로, 일신 상의 특별한 사유 없이는 자신의 환자를 다른 학생에게 넘길 수 없다. 따라서 플랜 B는 나에게 치료받으러 오겠다는 새로운 환자 중 신경치료의 냄새가 나면 모두 여자 친구에게 몰아주는 작전이다. 원내생 진료실은 대부분 예약제로 운영되기에 첫 내원 전에 유선상의 통화 또는 SNS로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물어보는 것이 관례다. 이때 '차거나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 치아가 시리고 아프다' 또는 '치아가 깨졌다' 등의 말을 듣게 되면, 환자분께는 저보다 실력 좋은 선생님 앞으로 예약해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여자 친구 앞으로 환자 약속을 잡았다.  

 뜨거운 음식을 먹을 때 위쪽 어금니가 아프다는 환자가 찾아왔다. 뜨거운 음식에 불편하다는 것은 '비가역성 치수염'의 대표적인 증상으로, 신경치료가 첫 번째로 고려되는 치료방법이라고 교과서에 적혀있다. 크리스마스 선물상자를 열어보는 아이처럼 잔뜩 기대하고 환자의 입안을 들여다본 여자 친구는 잠시 후 갸우뚱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빼꼼 쳐다봤다. 나도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본다. 환자는 우리가 별말 없이 눈빛만 교환하고 있으니 긴장했는지 코를 훌쩍인다. 이럴 수가. 깨끗해도 너무 깨끗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교수님을 대동하여 검진을 해보는데, 교수님이 뜬금없이 환자분께 평소 비염이 있느냐고 묻는다. 요즘 비염이 심하다는 환자의 대답과 함께 교수님은 웃으시며 비염 때문에 위쪽 어금니가 아픈 느낌이 들 수 있다며, 충치 문제가 아니니 이비인후과에 가서 비염 치료를 받으라고 친절히 설명해주신 후 자리에서 떠나셨다.  


 몇 주 전에 치아들이 빠지고 깨져서 음식을 먹지 못하겠다고 예약을 잡은 환자가 드디어 찾아왔다. 환자분이 진료실에 들어오고 여자 친구와 상담을 하는데, 뭔가 묘하게 대화가 흘러간다.

 "집 근처 치과를 다녀오셨다고요? 거기에서 상담만 받으셨나요?"

 "아니, 상담만 받은 게 아니라 치료도 좀 받았어~"

 "언제쯤 어떤 치료받으셨는지 기억나세요?

 "이틀 전에 신경치료 싹 끝냈지!"

  하... 플랜 B도 실패다. 이제는 플랜 C다.


  플랜 C는 역분식회계 작전이다. 원내생 진료실 규율상 홀로 진료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 명이 함께 술자-어시스트 팀을 이뤄야 하는데, 진료는 많이 할수록 확률상 졸업에 가까워지지만 어시스트는 일절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면 아무도 어시스트를 하고 싶어 하지 않기에 시스템이 붕괴될 수도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 묘안을 하나 냈는데, 바로 진료시간과 어시스트 시간을 1 대 1 비율로 맞추지 않으면 페널티를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 오전에 내가 3시간을 진료했다면, 언젠가는 어시스트로 3시간 일을 해야 한다. 꽤나 일리가 있는 시스템이지만, 여자 친구는 현재 신경치료 환자를 찾기 위해서 계속 진료를 봐야 한다. 즉 진료시간을 계속 써야 하는데, 그럴수록 어시스트로 일해야 하는 시간이 늘게 된다.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어시스트를 할 여유는 그녀에게 없다. 그래서 회사가 역분식회계 방법으로 실제 이익을 축소해 세금 인상을 피하는 것처럼, 내가 그녀의 전담 어시스트로 들어가 회계장부를 조작한다. 2시간 반 진료시간은 30분으로, 3시간 진료는 1시간으로 싹둑 자른다.

 물론 이 방법을 사용하면 나의 재무 안정성이 흔들린다. 3시간을 어시스트해도 1시간만 어시스트한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괜찮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무엇보다 나는 여태껏 진료가 많지 않아 동기들의 어시스트를 주로 들어가서 어시스트 시간을 벌어왔기에, 당분간은 충분히 모회사의 진료 시간 부도를 막아줄 여력이 됐다. 우리는 그렇게 기약 없이 신경치료 환자를 기다린다. 최종화에서는 밝은 빛을 볼 수 을 것이라 굳게 믿고, 어쩌면 동굴일지도 모르는 긴 터널을 걷는다.


 토요일 아침, 전날 환자 예약 취소로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어젯밤 여자 친구와 통화할 때 내일은 충치치료를 받고 싶어 하는 새로운 환자가 온다고 했으니, 지금쯤 그녀는 신경치료와는 거리가 먼 충치치료를 하며 헛물켜는 중일 것이다. 욕실에 들어가서 씻으려고 했는데, 요즘 학교 일에 너무 정신이 팔렸는지, 집에 있는 칫솔 모가 벌어지고 치실이 떨어진지도 몰랐다. 하루만 양치질과 치실을 빼먹어도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아왔지만, 지금은 다르다. 양치질 좀 덜 해서 나에게 신경치료할 치아가 있었다면, 여자 친구의 무사 졸업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마감이 20일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지 이런 쓸데없는 죄책감이 머리를 맴돈다. 한숨을 푹 쉬고, 교체시기가 일주일은 지난 칫솔을 집어 들어 대충 치아에 문댄다. 다른 날보다 오늘 유난히 입안이 텁텁하지만 데이트를 늦을 순 없어 그만 씻고 나와 나갈 채비를 한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내던 중 때마침 여자 친구에게 카톡이 온다. 벌써 끝날 시간은 아닌데, 혹시 환자가 노쇼를 했나 싶어 어떻게 위로의 멘트를 해야 하나 생각한다. 앞뒤 내용 하나 없이 딱 다섯 글자 카톡이 와있다.


"완전 썩었어"


 귀인이 오셨다. 드디어. 지지부진했던 '난관 봉착' 스토리에 8차선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려 '극적인 해결'까지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게 됐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겸손하기까지 한 귀인이시다. 왼쪽 위 작은 어금니 한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기에 치아를 뽑을게 아니라면 필수적으로 신경치료가 필요했다. 환자분도 집 근처 치과에서 신경치료밖에 답이 없다는 말을 이미 들어서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신경치료가 아닌 충치치료를 명목으로 예약을 잡은 건, 우리 커플 스토리에 더욱 드라마틱한 해피엔딩을 가져다 주기 위한 건 아니었을까?

 신경치료는 몇 번의 내원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그녀는 마감을 보름 남기고 마지막 퍼즐이었던 신경치료 케이스를 끝냈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라는 슬램덩크의 영감님 말처럼 끝까지 버텨 결국에는 우리 힘으로 졸업을 이뤄냈다. 긴 어둠을 지나 터널 밖으로 나온다.


 오늘 밤 집에 돌아가는 길, 칫솔과 치실 한 통 사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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