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대학 입학 인터뷰
왜, 치과 의사인가? 치과 대학원에서 입학 인터뷰 때 받았던 질문이 내 미래를 규정했다. 롤러코스터처럼 살아온 삶의 무게를 단순하게 표현하자니 어렵고 억울 하기도 해서 머뭇거리는 사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 실체를 알 수 없이 자리 잡은 무언가가 데자뷔(Déjà vu)처럼 스친다. 건전지의 양극을 혀로 맛볼 때 같은 의식의 찌릿함과 비릿함을 느꼈다. 영화 연출을 전공했었던 내가 36살에 학부에 다시 들어가 선수 과목들을 마치는데 2년이 소요됐고 DAT (Dental Admission Test)라는 치과대학 입학시험을 본 후 치과대학에 지원했다. 미국 치과 대학의 지원은 6월에 시작하고 9월부터 는 인터뷰를 기다리는 초조한 날들이다. 주위에 누가 인터뷰를 받았다는 소식이 들리면 조바심은 배가 된다. 드디어 첫 인터뷰요청을 받은 날 오랫동안 내 독서실이었던 커피숍 직원분들과 기쁨을 나눴다. 누군가는 전진의 이름으로 산에 오른다. 열심히 산에 올라 정상에 도착 후 주위를 돌아보니 혼자인 기분. 전진을 마쳤을 때를 대비하지 않으면 성취감의 빈 공간에는 외롭고 낯선 감정들이 드라이하게 찾아 든다. 호모 사피엔스는 관계가 필요하다. 추억거리들을 혼자만의 기억의 창고에 보관하며 회상하는 건 쓸쓸하다. 치의대에 들어가서는 그런 드라이한 시간을 수년간 더 연장해야 했다. 아무리 물을 쏟아부어도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격렬한 건조함. 사막이 나의 몸을 관통한 것 같은 건조함에는 기쁨이 결여되어 있다. 실제로 덮다 내가 입학한 치과대학은 아리조나에 있다. 서글픔, 외로움, 쓸쓸함 등의 단어들과 화해를 해야한다. 희로애락의 단편들을 혼자만의 가슴에 담아 두고 살아가야 한다.
인터뷰에서는 공공의료에 관심이 많고 졸업 후에도 under served area에서 봉사하면 행복할 거라고 답했지만, 내가 인터뷰한 치의대의 모토가 공공 의료 서비스였기 때문에한 거짓말이었다, 입학 후 오리엔테이션에서 “여러분들을 환영하며 4년 뒤 여러분들 중 30%는 학교의 모토인 공공의료에서 리더가 될 겁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미안하지만 난 그 30%에는 절대로 들지 않을 거야. 난 돈을 많이 벌 거야”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캐나다 국경 근처 시골 Upstate NY에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미 육군 에비역 군이관 대위가 되었다. 행복한가? 인생의 목표는 돈이 아니라 행복이어야 한다. 어떤 이는 불행한 일이 없으면 행복하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눈, 코, 입 있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조차 행복이라고 소극적 의미의 행복을 강조한다. 사상가 에피 쿠로스는 성취에서 행복이 생기는 게 아니라 욕망을 줄여나가는 것에서 행복이 생긴다고 하였다. 마음을 다스리면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인데, 반만 동의한다. 행복을 피부로 느낄 실존인 내가 없다면 행복을 느끼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니까. 우리 마음의 평안이 오면 몸도 건강해 지지만, 몸이 건강해야 마음의 평안도 누릴 수 있다. 법정 스님도 무소유란 소유하지 않는 게 아니라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 하셨다. 전 세계 인구 중에서 아침, 점심, 저녁, 삼시새끼를 모두 먹을 수 있는 인구는 불과 5%. 세계 어린이들 일 억 명 이상이 홈리스이고 매일 이만 명의 아이들이 치료받지 못해서 병으로 죽어가고, 세계 인구 절반인 30억 명이 화장실 없는 집에 산다.
60세 정년 도입 후 대한민국 퇴직 연령은 53 세서 49세로 낮아졌고 그중 40% 이상이 비 자발적 은퇴이며 실제 은퇴 연령은 72세로 이는 무려 23년을 책임질 새 직장을 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노인 빈곤율은 38% OECD가입 국가들 중 한국 근로자들은 더 오래 일하고 더 가난하게 은퇴를 맞는다 이 계층을 서포트하게 될 청년층의 현실은 더 암담하다 한국에서 선망 직업중 하나인 의사의 바늘구멍은 좁아서 심지어 동유럽 국가로 의대를 가고 한국 의사고시를 패스하려는 우회로를 찾지만 이 역시 가능성이 크지 않다 비영주권자로서 미국에서 의사 되기또한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미스코리아 진 출신으로 하바드 대학서 우수학생으로 졸업한 금나나씨도 지원한 26개 의대 중 합격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미국 의대 진입장벽은 높다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자국 의료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인의 시장 진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플랜 B는 있다 미국 보건소에서 일하는 필자는 Under served area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연봉 외에 2년 계약에 7천만 원을 주에서 지원받는다. 내 연봉은 대략 3억 5천이다. 인력이 부족한 미구 치과의사는 상대적으로 외국인에게 개방되어 있고 졸업 후 영주권 수속 스폰을 해주는 병원도 넘쳐 난다. 미국 의대수는 150개로 한해 2만 명의 의사를 배출하지만 상대적으로 치대는 65개에 불과하며 한해 5천명의 치과의사를 배출하고 이마저도 대도시로 몰리기 때문에 치과의사는 늘 부족하다. 이 틈새를 노린다면 이 책을 읽는 구독자들의 23년과 그 자녀들의 인생은 충분히 보상받을 것이다. 이들은 내 출판 기획의 예상 독자층이기도 하다 청년 실업 인구는 매년 30만 명이고 비 자발적 은퇴 인구는 매년 80만 명이다 내게 질문을 주시는 많은 분들이 자녀의 진로 상담과 동시에 그들을 서포트해야할 자신들의 진로 역시 고민스러움을 말한다. 난 46살에 치과의사가 됐고 함께 일하는 동료 의사들 나이 역시 72세와 75세로 적지 않다. 눈만 보이고 손만 떨리지 않는다면 전문직을 유지 할 수 있다. 적어도 23년의 비굴한 구직 활동은 없다. 워라벨도 좋다 주 4일근무다. 그렇다면 미국 치과의사가 되는 길이 어려운가 대답은 YES or NO다 결코 쉽지만은 않다 하. 지. 만 한국과 비교하면 비교 불가다 재수 삼수할 시간에 4년공부하면 치과의사가 된다. 나이 46에 미국 치과의사가 된 나의 한국에서 성적은 꼴찌였으며 학부는 영화 연출과를 졸업했고 치과의사가 되기 전 직업은 술집 웨이터였다.
한국에서 고려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미국서 간호사로 일하는 아내는 나와는 결이 다르지만 늦깍이로 간호사커리어를 시작했다는 점은 같다 아내는 그녀의 일을 사실 즐겨하지는 않았다 그 와중에 코로나가 터졌다 지금은 좀 진정이 되었지만 한때 내 아내는 하루 12간 시프트 3일을 근무하고 주 천만원을 벌어 들였다 내 아내는 클래식 애호가다 미국 말에 월스트리트 사람들은 쇼팽과 베토벤을 논하지만 음대 출신들은 매일 같이 돈 걱정을 하며 살아간다는 말이있다 돈이 전능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삶을 풍족하게 하는건 사실이다 현재 45살 아내는 파트 타임으로 병원서 일하며 간호사 위 단게인 Nurse practioner 학교에 다닌다. 틈틈이 바이올린 레슨도 받는다
어떤 이의 성공이 다른 이들에게 불행을 준다면 진정한 성공은 아니다. 환자들의 통증을 없애주고 마음을 다스려 주며 받는 보상이 보람으로 그치지 않고 경제적 자유를 보장해 주고, 그 경제적 자유에서 나오는 삶의 매력, 적어도 외적인 면에선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톨스토이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행복한 가정의 사정은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다" 나의 진정한 행복은 아직도 도전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 내 목표는 단순히 ‘의사’가 아니라 ‘선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의사’였기 때문에 내 도전은 계속된다. 인생을 계획하지 않은 자들은 계획하는 소수 인생의 들러리가 된다. 교육자, 미술상, 목사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던 후기 인상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화가로 활동하기 전 1881년 12월 동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물감을 이제 받게 되어 매우 기쁘다. 첨부터 색칠 없이 일 년 동안 스케치만 한 것이 오히려 큰 도움이 된 듯. 물감을 묻히는 순간 내 커리어가 진짜로 시작되기 때문이야” 내 인생이 잘 포장된 도로 같아서 행복한 게 아니라, 인생 속의 만발한 꽃의 향기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하지만 나 또한 무채색으로 포장조차 되지 않은 거친 길을 걸어왔음을 고백한다. 그 길을 보여주는 일이 다소 창피하지만 “좋은 글을 쓴다는 건 잘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잘 노출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용기를 얻는다. 생각해 보면 인터뷰 당시 받았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나를 돌아보는 치유의 과정이었다. 내글은 ‘평범한 자녀를 미국 명문대에 입학시키기 위해 엄마들이 알아야 할 지름길’ 같은 걸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포기하라고 말하고 싶다 나를 노출하면서 얻어지는 지혜로 더 큰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술집 웨이터가 ‘3년에 10억 만들기’의 작가가 되어 성공과 파산이라는 좌절을 겪은 후, 다시 3억 연봉 미국 치과의사가 되었다. 뉴욕에서 한인 의사가 경영하는 CITY MD라는 프랜차이즈급 Urgent Care가 있다 연말마다 열리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되어 참석한 적이 있다 내가 놀란 건 CEO가 수많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본다. 나와 내 아내가 지나온 흔적이 길이 되어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나는 걸 본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단언하건대, 내가 할 수 있었다면 당신도 할 수 있고, 당신이 지나면 사람들은 그걸 길이라 부를 것이다. 다르지만 틀리지 않은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