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said
>> 여행에 관한 9가지 진실(1) 에 이어
어렸을 때 동생들과 내가 가장 설레던 때는 집에 방문하신 손님의 손에 들려있던 종합과자세트를 발견했을 때였다. 우리 세 남매는 그때부터 손님이 가시기만을 기다리면서, 안에 어떤 과자들이 담겨 있을까에 대해 열띤 토론을 했다. 손님이 너무 늦게 가시면 막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그 과자들은 고스란히 나와 둘째의 전리품이 되기 일쑤였고, 다음 날 아침 우는 막내를 달래주는 것은 늘 어머니의 몫이었다.
내가 9살이었던가, 크리스마스 무렵, 방문하셨던 어떤 손님이 들고 오셨던 사상 최고로 큰 그 종합과자 선물세트는 우리 셋을 광란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엄청나게 큰 박스 안에 담겨 있던 온갖 과자와 사탕들에 우리 세 남매는 잠시 넋이 나갔다. 이내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모두의 눈빛이 날카로워지기 시작한다. 다양한 과자들을 서로의 이해를 반영하여 정확히 3 등분하는 일은 단언컨대 지혜로운 솔로몬 왕도 해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장시간의 설전 끝에, 나는 첫째의 권력을 십분 남용하며 가장 맛있어 보이는 쿠키를 쟁취했다. 얼마나 아름찼던지! 그 당시에 보기 힘든 꽤 고급스러운 포장이 내 눈을 확 사로잡았다. 입에서 살살 녹던 그 쿠키의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떠오른다. 그러고 보면 피렌체는 그 쿠키와 닮았다. 내게 피렌체는 화려하진 않지만 클래식한 아름다움과 고풍스러운 낭만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약 2시간 반이 걸려 드디어 피렌체 산타 노벨라 중앙역에 도착했다. 여행지를 옮길 때마다 가장 귀찮으면서도 가장 설레는 일은 숙소를 찾아 잠시 머물 둥지를 트는 일이다. 이곳 피렌체에서는 처음으로 현지인과 숙소를 셰어 하게 되었다. 에어비앤비로 구한 귤리아네 집은 49번지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주소에 들어가는 숫자 9. 누가 보면 아홉수를 떨쳐버리겠다고 일부러 집의 번지수에도 9가 들어가는 곳만 쏙쏙 구했다고 오해할지 모르겠다. 숙소의 경우는 그 위치와 상태, 그리고 9와 나의 상대적인 호불호에 따라 정확히 객관과 주관이 반반 혼용된 꽤 납득 가능한 기준으로 선정했다. 솔직히 말하면, 비슷한 숙소가 두 개 있을 때, 숫자 9와 관련한 무언가가 눈에 띄면 더 끌렸던 건 사실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구글신과 접신을 시도한 9는 지름길을 찾아냈다며 호들 거리며 나를 안내했다. 그러나 분명히 거리는 잘 찾아왔는데 여길 보고 저길 봐도 48 다음에 바로 50번지였다. 당황하여 같은 거리를 여러 차례 왔다 갔다 했다. 계속 캐리어를 끌고 무의미한 이동을 할 수 없어서 내가 좀 돌아보기로 했다. 어떤 가게에서 비스듬히 서서 쉬고 계신 할아버지께 여기가 비아 ***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하신다. 분명히 도로는 맞는데 여전히 49번지가 확인이 안 된다. 다시 할아버지께 가서 지도를 보여드리면서 이것저것 여쭤본다. 나는 영어로 물어보고 할아버지는 이탈리아어로 대답하셔서 둘 다 답답했지만, 할아버지가 손짓 발짓으로 참 열성적으로 알려주신 덕에 얼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요지는 우리가 찾은 쪽의 번지수는 maison이고 맞은편이 casa여서 그 네모에 파란색 숫자가 쓰여 있는 번지수를 봐야 한다는 거였다.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주소체계지만 열심히 설명해 주신 할아버지 덕에 우리는 제대로 된 방향을 찾았고 드디어 49번지를 찾아내었다!
집은 어두웠고 미로 같았다. 이 방 저 방 둘러보다가 우리 방인듯한 방에 짐을 풀었다. 귤리아에게 전화를 시도했으나 받지 않고 통화 중이라 들어왔다고 문자만 남겼다. 잠시 나가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니 귤리아가 우리를 맞아준다. 드디어 만났다. 역시나 이탈리아 사람답게 귤리아는 말이 많았다. 불라불라. 블라블라. 얼추 내가 알아들은 바로는 오늘 정말 정말 미안했고, 내일은 매우 중요한 시험이 있다고 한다. 자신은 음악 선생님이 되려고 하는데 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아마도 한국으로 따지면 임용시험 같은 거로 파악된다. 내일 아침까지 책을 10권은 봐야 한다고 했다. 되게 피곤한 얼굴임에도 세세하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속사포처럼 수많은 얘기를 늘어놓고 굿 나이트 인사를 하며 나가는 귤리아가 싫진 않았다. 방이 좋아서 그랬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입성한 우리의 방은 밝고 넓었다. 정말 맘에 들었다. 그동안 받은 모든 스트레스와 피로를 말끔히 잊어버릴 만큼. 침구는 깨끗했으며, 딸린 화장실은 최근에 리노베이션을 해서 깔끔했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한쪽 구석엔 귤리아가 학창 시절에 썼던 손때 묻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왠지 정말 이탈리아에 사는 친구네 집에 놀러 온 기분이 들어서 편안해졌다. 이 방의 화룡점정은 창 밖으로 보이는 녹음이 만연한 보볼리 공원의 풍경과 아침마다 온갖 새들의 지저귐과 함께 잠을 깨곤 했던 상쾌한 아침이다.
여행에 관한 9가지 진실 넷, 시작은 곤란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일요일엔 늘 우리 집만의 루틴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동생들과 비몽사몽인 상태로 만화를 봤다. 매번 제일 늦게 일어나곤 했던 막내는 종종 아버지가 장롱 위에 놓아둔 과자 상자에서 산도를 꺼내어 오물오물거리며 반쯤 누워 만화를 보곤 했다. 다음은 아침 식사 시간이다. 일요일 아침은 특별히 서양식으로 빵과 삶은 계란 그리고 요거트와 과일들을 먹었다. 다음은 대청소 타임이다. 군인이셨던 아버지는 늘 정갈한 정돈 상태와 청결을 강조하셨다. 매번 툴툴거리며 일어나 청소를 했지만 그래도 깨끗해진 내 방을 보면 나름 보람차기도 했다. 청소를 다 마치면 이제 성당에 갈 준비를 한다. 나의 세례명은 프란치스카. 모태신앙이라 종교 선택의 자유가 따로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나름 천주교인으로서의 인생도 내게 꽤 의미가 있었다. 중고등학교를 지나 성인이 되어가는 시간 속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성당에 가서 큰 위로를 받곤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 년에 한두 번, 크리스마스이브와 설에만 성당에 나가는 날라리 신자이지만, 여전히 내 안에 분명히 프란치스카로서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니 진정한 나를 찾아보겠다고 떠나왔던 이 여행에서, 성 프란치스코 성인(St. Francis)이 태어난 아씨시로의 여정은 어쩌면 숙명이 아니었을까.
아씨시에 당일로 다녀오기 위해서는 새벽같이 일어나야 했다. 기차로 아씨시 역까지 편도만 거의 3시간이 걸리는 데다가 버스도 이용해야 하니 정작 관광할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산타루치아 역에서 별 기대 없이 샀지만 깜짝 놀랄 맛을 선물해 준 나의 인생 바닐라 크로와상 덕에 아씨시로 향하는 길은 이미 출발부터 기대감 만땅이다. 보통 아씨시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내려 위로 올라가면서 관광을 하는데 우리는 아예 종점으로 올라서 matteore를 먼저 보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며 관광을 했다. 정상에 오르니 아담하고 푸르른 아씨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참 평화롭고 아름다운 마을이다. 확실히 높은 곳에서는 바람이 꽤 세차게 불었는데 그 청량한 느낌이 좋았다. 사진을 찍으며 유유히 걸어 내려오다가 어느 바에 들러 전경을 감상하며 화이트 와인을 한잔했다. 캬~ 좋다!
마을이 꽤나 부산스러웠다. 전통 의상을 입은 마을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어떤 건물 앞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여기저기 장식을 하며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들고 있었고, 또 어떤 곳에서는 북치는 사람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에 큰 무대를 볼 수 있었고, 사운드 체크를 하며 리허설까지 하고 있었다.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던 한 청년에게 다가가 다짜고짜 영상을 찍으면서 인터뷰를 시도했다. 엊그제부터 페스티벌을 한단다. 페스티벌의 이름과 종류를 알고 싶었으나 영어가 서툰 청년이었던지라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뭐 아무렴 어떠랴. 축제로구나~ 우리가 왔다고 축제를 하는 게로구나~
다시 작은 골목길들을 구경하며 지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내려갔다. 하느님의 음유시인, 가난한 이들의 친구, 동물들의 수호성인으로도 알려진 프란치스코 성인 역시 이 길들을 거닐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정말 신기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했었다. ‘백 년마다 한번 성 프란치스코가 태어난다면 세상의 구원은 보장될 것이다.’라고.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요즘 세상은 더 각박하고 황량해졌다. 그러니 성 프란치스코가 최소 9년마다 한 번은 더 태어나야 세상의 구원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좀 더 내려와 드디어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다다른다. 오 정말 예쁘다. 예쁘다는 말로만 표현하기엔 왠지 가볍고 경박하다. 성스럽고 고아하다. 보안 검사를 통과하고 성당에 들어서는데 이곳은 사진 및 영상 촬영이 안 된다고 한다. 그래 말 잘 들어야지~ (라고 해놓고 막판에 한 장 몰래 찍었다;) 이 성당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지하 성당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고 분위기가 매우 숙연했다. 조용히 앉아 잠시 묵상했다. 사실 9는 무교인 데다가 이름도 생소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출생지인 아씨시와는 별 연결고리가 많지 않다. 그래서 내가 여행 계획을 짜면서 굳이 피렌체에서도 가깝지 않은 아씨시를 추가했을 때, ‘굳이 왜 거길 가야 하냐.’하는 반응이었다. 9에겐 도무지 동선이 아름답지도 명분이 확실하지도 않은 그저 황당한 장소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배려한 9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오늘은 특별히 9를 위해 기도했다. 9가 언제나 자신을 괴롭히던 수많은 의문과 불안에서 자유로워지길 염원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벽과 천장엔 빛바랜 프레스코화가 뒤덮고 있었는데, 후기 중세의 많은 로마파와 토스카나파 화가들의 작품이라고 한다. 성 프란치스코 성인이 새들에게도 설교했다는 일화는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그림으로 보니 더 정감이 갔다. 다른 그림들도 하나하나 어떤 심오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듯했다.
역시 모든 관광의 마무리는 기념품샵이지. 기념으로 1유로짜리 나무 십자가 목걸이를 구입했다. 횡재한 느낌이다.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1228년 프란체스코 성인이 시성 직후 건설되기 시작했으니 벌써 그 역사가 약 789년이나 되었다. 성당이 건립된 아시시 서쪽의 이 언덕은 과거에 죄인들의 사형이 이루어졌던 곳이라 "지옥의 언덕"(이탈리아어: Collo d'Inferno)이라고 불렀었단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재는 성 프란치스코 성인의 활약(?)에 힘입어 "천국의 언덕“으로 불린다고 한다. 이것이 소위 후광효과인가. 역시 사람은 깨우쳐야 하고 변화해야 하고, 그로써 이루어야 한다. 매 순간은 지나가고 지나가지만 끝을 향해 늘 변화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여행에 관한 9가지 진실 다섯, 늘 푸르름은 상록수의 일이니, 이루기 위해 떠나 온 당신은 늘 변화하라.
단테의 「신곡」 지옥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인생의 중반기에서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에는 캄캄한 숲 속에 있었다.
그 가열(苛烈)하고도 황량한, 준엄한 숲이
어떤 것이었는지 입에 담기조차 괴롭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그 괴로움이란 진정 죽음과도 같은 것이었다.
단테는 가장 화려해야 할 중년의 나이에 어떤 고뇌와 방황을 했던 것일까. 단테는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나는 한참 사춘기가 절정에 이를 무렵인 중 2 즈음에 이 구절을 만났다. 그 무렵 나의 하루하루엔 단테가 언급했던 9가지 지옥이 한꺼번에 펼쳐지는 듯했다. 난 무르익기도 전에 나무에서 떨어져 상처로 얼룩진 성질 고약한 사과 같았다. 같잖은 허세와 불만으로 가득 차 벌써 속세의 허망함을 논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읽으면서는 희미하게 나이를 꽤 먹으면 이 모든 괴로움이 끝날 수 있게 되길 희망했었다. 그러나 중년이 된 지금도 방황은 계속되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속박에 휘감겨 있다. 다만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는 아홉 줄기 희망의 빛이 나를 인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을 뿐이다.
수많은 상념을 뒤로하고 피렌체의 마지막 날을 시작한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두오모에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다. 두오모에 가려면 아침 일찍 가는 게 좋다는 조언들이 많았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줄을 서서 하릴없이 기다린다. 우리의 48시간 짜리 관람권은 1시 정도에 마감된다. 그런데 12시 반이 지나가도 줄이 줄지를 않는다. 주변에 skip the line 플래카드를 들고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돌아다녀서 하마터면 낚일 뻔했다. 두오모에 올라가자고 15유로 관람권에 그 가이드 투어비 10유로 이상을 더 낼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관광객 코스프레를 더 해야 할지 아니면 자유로운 방랑객 모드로 쿨하게 포기할지. 5분 내에 정한 만큼 줄이 줄지 않으면 미련 없이 뜨기로 했다. 사실 그 시간은 정신승리를 위한 시간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조토의 종탑’에는 올라가 봤으니 별 차이 없을 거야. 영화 ‘냉정과 열정사이’의 남자 주인공이 구여친을 만났던 그 장소. 영화 속 장면이랑 별 차이 없겠지 뭐. 두오모 뭐 그까짓 거. 짧은 시간 나야말로 온탕과 냉탕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5분이 채 되기도 전에 줄을 버렸다. 괜한 희망에 목을 매어 소중한 이 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중앙시장에 그 맛있다는 꼭 한 번은 먹어봐야 한다는 버거집을 찾아 걸어가면서 애증의 두오모는 깡그리 잊어버렸다.
재료가 다 떨어지면 문을 닫는다고 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여기도 또 줄이 장난 아니다. 메뉴판을 봤지만 1도 몰라서 친절한 녹색 검색창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곤 멋지게 수육 버거와 곱창버거를 주문했다. 주문받는 사람들은 웃음기 없이 매우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전리품을 획득한 듯 양손에 버거를 들고 전에 봐 두었던 근처 광장으로 향했다. 온갖 블로그들에서 그렇게 극찬을 쏟아냈던 소스 맛은 그냥 매콤한 맛 그거뿐이었다. 고기는 부드럽지만, 꼭 먹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딱 그뿐이었다. 눈앞 광장에서는 메리고라운드가 돌아가고 있었다. 한없이 돌아가는 메리고라운드에 애써 집중해 맛없는 버거를 다 먹어치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결국 반밖에 못 먹었다. 왜 꼭 먹어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그랬다. 음식 맛에 대해 웬만하면 불평하지 않는 9가 이 버거들이 피렌체의 이미지를 훼손시켰다며 완전히 불쾌해했다. 어젯밤 귤리아한테 이 버거에 관해 물어봤을 때 영 시답지 않은 반응을 보이더니만, 역시 현지인의 말을 따랐어야 했다. 그래도 블로그 사진에 현혹되어 혹시나 해서 왔더니 이런 불상사가 생기고 말았다. 이렇게 된 바에 피렌체 명물이라는 스테이크도 손절이다. 혹시나가 아뿔싸로 바뀌는 이런 경험은 한 번으로 족하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문에는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라고 어두운 글귀로 쓰여 있다. 지옥이든 현생이든 쓸데없는 희망은 독이 된다.
여행에 관한 9가지 진실 여섯, 여행자여, 모든 희망에 다 매달릴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