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 said
여행이란 무엇일까? 각자에게 각자의 정의대로 각인되는 독특한 경험이 아닐까. 얕은 개울가에 발을 담그면, 물속에 잠긴 발은 더 크게 보인다. 내 발이지만 더 이상 내 발이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든다. 책을 통해 열심히 빛의 반사와 굴절 이론을 배웠다고 해서, 책상에 앉아 열심히 머릿속에서 매질에 따른 입사각과 굴절각을 그려 본다고 해서 절대 얻을 수 없는 감각적 경험이다. 그러니 직접 느끼기 위해 우리는 여행을 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을지 나쁠지는 직접 경험해봐야 알 수 있다. 여행의 모든 순간이 기쁘고 즐겁다면 재미없을 거라는데, 그건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난 그래도 정말 좋을 것 같은데? 특히 예상 밖의 너무나 난처한 상황에서 고생하고 있는 지금과 같은 이런 순간들은 없어도 좋을 것 같은데?
'아, 너무 춥고 불편하다!'
잘츠부르크에서 베니스까지 야간열차의 침대칸에서 옴짝달싹 못한 채 덜덜 떨면서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기다리며 누워있는 이 순간을 훗날 내가 ‘그럼에도 좋았다.’라고 할 것 같진 않다. 나중엔 생각이 바뀔지는 몰라도 지금은 단호히 아닐 것 같다. 베니스행 야간열차는 안 그래도 1시간이나 연착되면서 9의 애간장을 다 녹여놓더니 이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꽁꽁 얼려놓았다. 야간열차의 침대칸은 한 칸에 4명이 취침 가능한데, 운이 좋으면 같은 칸에 다른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해서 내심 기대했었다. 하지만, 열차에 탔을 때, 우리 칸 2층에는 덩치 큰 유럽 여자 2명이 이미 불을 끄고 취침 중이었다. 우리는 마치 죄인인 양 불도 제대로 못 켜고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대충 짐을 정리하고 조용히 나와 간단히 씻었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하며 옷을 갈아입고 겨우 누워서 잠을 청한다. 하필 덩치도 산만한 사람들이 윗 칸에 누워있으니까, 혹시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이건 아닌데. 우리가 생각했던 침대칸 여행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창밖으로 밤 풍경을 느끼며 도란도란 얘기하며 베니스로 향하는 그런 그림을 상상했는데. 사실 침대 좌석이 좀 비쌌기 때문에 일반 좌석을 이용할까 고민했었다. 그러나 일반 객실에서는 캐리어의 도난 위험도 있는 데다가 역무원들이 따로 관리도 안 해주고 거의 방치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래서 열차에서 숙박해보는 경험도 나쁘지 않을 거라며 애써 정신 승리하며 100일 전 온라인으로 예약했던 야간열차였다. 그런데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침대칸 여행은 너무 춥고 불편하고 힘들고 있는 중이다. 열차에 마련된 이불을 덮고 준비해 간 겉옷을 덮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너무 추웠다. ㅠㅠ. 아침에 일어난 9는 밤새 추위에 오들오들 떨어 몰골이 처참했다. 열차에서의 야간 이동은 한 번의 경험이면 족하다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훗날 괴짜 여행가의 무용담에나 충분히 어울릴만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아아, 애증의 야간열차.
여행에 관한 9가지 진실 하나, 과도한 기대는 화를 불러온다.
드디어 창밖으로 여명이 밝아온다. 추위에 덜덜 떨며 거의 뜬눈으로 지새운 고통의 밤이 지나가고 희망의 아침이 다가온다. 늘 당연하게만 맞았던 아침의 태양이 오늘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8시 39분경, 베니스의 산타루치아 역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다. 따뜻한 햇볕에 몸과 마음을 녹인다. 피곤했지만 베니스의 생경한 광경들에 잠시 피로도 잊은 듯했다. 숙소를 찾아가는 길에 탄 수상 버스와 꼬불꼬불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들. 다양한 매체로만 보아왔던 베니스의 모습이 눈앞에 하나둘씩 펼쳐진다. ‘우와!’라는 감탄사만 연거푸 내뱉고 있다. 비현실적이다. 이국적이다. 신기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문득 대학교 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던 선배가 선물이라며 주었던 벨기에 초콜릿 세트가 생각난다. 정사각형의 박스 안에 12개의 다양한 바다생물들을 모티브로 한 초콜릿들이 올망졸망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내게 던져진 세상 가장 커다란 고민은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였다. 화이트 혹은 블랙의 단일 색상 초콜릿들은 무난하게 맛이 예상되었던 반면, 화이트와 블랙 초콜릿이 오묘하게 어우러진 초콜릿은 그 맛을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몇 초콜릿은 위스키나 럼과 같이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물까지 담겨 있었으니, 내겐 매번 한없이 어려운 선택의 순간들이었다. 그 어려웠지만 황홀했던 선택의 시간들을 선사해주었던 초콜릿들을 찬탄한다. 그 초콜릿들 중에 제일 화려했으며 내 입안에서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최고의 황홀감을 안겨주었던 불가사리 초콜릿을 떠올린다. 여행이 각양각색의 초콜릿들이 담겨 있는 초콜릿 상자와 같다면 베니스는 그 불가사리 초콜릿을 닮았다. 내내 생경하지만 설레고 순간 아득하지만 번뜩인다.
우리 방에 딸린 아담한 발코니에 앉아 따뜻한 햇빛을 받으며 시원한 맥주 한 잔을 들이켠다. 5층 높이의 테라스 아래로는 좁은 골목길에 빽빽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갈 길을 재촉하고 있다. 그 소란스러움과 바쁨을 아래로 하고 즐기는 위에서의 뿌듯한 여유. 고개를 들면 파아란 하늘 위로 내 맘도 뭉개 뭉개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나는 지금 베니스에 있다. 믿기지 않지만 우리는 지금 베니스에 있다.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삼키려 애쓰지만 이미 얼굴 전체에 퍼진 웃음꽃은 감출 길이 없다. 베니스의 사악한 물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베니스만큼은 정말 중심부에서 제대로 즐겨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 발코니를 사수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행 경비를 곳곳에서 조금씩 줄여야 했지만, 직접 와서 보니 더 이상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탈리아 본토에서 약 4㎞ 떨어진 아드리아 해(Adriatic Sea)의 리알토(Rialto) 섬을 중심으로 116개의 섬들이 옹기종기한 409개의 다리와 구불구불한 수로로 연결된 독특한 풍광의 수상도시 베니스. 이탈리아에서 중세 유적을 가장 많이 간직한 도시들 중에 하나인 베니스. 베네치아라고도 하는데, 내겐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때문인지 베니스가 더 익숙하다. 셰익스피어는 18세에 8세 연상인 앤 해서웨이와 결혼한 후, 약 7-8년간 유럽 각지를 여행하며 많은 작품들을 썼다. 그 당시 융성했던 베니스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이 바로 ‘베니스의 상인’이었다. 내겐 그의 작품보다는 낭랑 18세에 8살 연상과 결혼하고 여행을 다녔다는 사실이 더욱 매혹적이었다. 하아. 18세에 사랑하는 사람과 베니스에서 시간을 보내는 기분은 어땠을까. 행복했으니 좋은 작품도 나왔겠지. 나신 분은 나신 분이다. 뭐 아무렴 어떤가. 나도 지금 여기 기가 막힌 베니스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는데.
베니스는 맘만 먹으면 반나절에도 다 돌아볼 수 있다지만, 난 특별히 약 99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물의 도시라는 별칭에 걸맞게 베니스의 지도 모양은 잘 보면 물고기를 닮았다. 그러니 물고기가 수로를 유유히 유영하듯 우리도 배를 타고 물의 길을 따라 유유히 이동한다. 마음에 드는 정거장에 내려 하릴없이 거리를 걷다가 지치면 로컬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으로 충전한다. 굳이 유명한 레스토랑을 찾아다니지 않고, 우연히 발견한 동네 피자 혹은 파스타 집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한다. 어떤 음식도 우리 발코니에선 다 맛있다. 여전히 마음은 충만하다. 낯선 풍경에서 불어오던 이국적인 내음에 매료가 된 것일까.
유명한 퐁테 다리(Ponte dei Tre Archi) 위에서 여느 관광객처럼 사진을 찍어본다. 특별해 보이지 않는 다리였지만 어느 곳에서 찍어도 엽서가 되는 그 신기함이란... salute 역에 내려서 베니스의 삼각지대라고 불리는 곳에서 파노라마 뷰를 감상했다. 잠깐 비가 내렸지만, 왠지 더 운치 있어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해안선을 따라 도서관 쪽으로 움직여본다. 가는 길에 포스가 심상치 않은 젤라토 집(Gelateria Nico)을 발견하곤 검색해 봤더니 오오오 역사가 100년도 넘은 집이란다. 여행 와서 처음으로 젤라토를 먹어보았다. 그동안 날이 추워서 엄두도 못 냈었는데 오늘은 이따금씩 미풍이 불어와 코끝을 간질인다. 젤라토에서 베니스 한 스쿱. 하하하. 역시 맛있다! 그리고는 구글신이 알려주는 대로 정말로 도서관스럽지 않은 빈티지 주택처럼 생긴 곳에 다다랐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대학 도서관이었다. 너무 작고 볼품없는 외관을 보고선 적잖이 실망을 했다. 그러나 입구를 들어서니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정말 넓은 공간이 미로처럼 펼쳐져 있었다. 도서관에 들어가기 위해 여권을 맡기면 임시 방문증을 받을 수 있다. 도서관에서 9와 나는 마주 앉아 서로의 생각을 정리하며 잠시 개인 시간을 가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열심히 공부하는 애, 공부 안 하고 딴짓하는 애, 자는 애, 멍 때리는 애 등등 다양했다. 화장실도 맘 편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잠시 베니스 대학생 코스프레를 한 후, 다시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덧 아름다운 첼로 선율에 홀리듯이 이끌렸다. 작은 광장에서 이름 모를 예술가가 첼로로 버스킹을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우리들도 꽤 오랫동안 음악을 감상했다. 음악에 취해서일까, 시간이 느리게만 가는 것 같았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고 우리의 베니스는 낭만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감사의 마음으로 동전을 놓고 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반면 그 유명한 산마르코 광장은 언제나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하다. 그래서 사진을 찍을라치면 어느 각도에서도 다른 관광객들이 걸리게 된다. 한낮의 산만하고 소란한 사람들로 가득 찬 산마르코 광장을 경험한 후, 우리는 야심한 시간에 다시 나오기로 했다. 숙소가 약 5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쌩얼로 대충 잠옷에 슬리퍼 찍찍 끌고 나와서 자유롭게 산마르코 광장을 거닐었다. 우리의 초라한 행색에 잠시 민망했지만, 오늘은 마지막 날이고 누가 기억이나 할까 싶은 생각에 대담해졌다. 마침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레스토랑에서 마지막 손님들을 위해 라이브로 바이올린 연주를 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운 좋게 바이올린 선율의 BGM을 사뿐사뿐 지르밟으며 심야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라 잠들고 싶지 않았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기 때문에 욕심부리지 않기로 했다.
여행에 관한 9가지 진실 둘, 오늘은 절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맘껏 즐겨라.
아직 잠이 덜 깬 9를 위해 일단 카페인 충전을 한다. 숙소 근처 1.5유로짜리 에스프레소 한잔. 역시 맛있다. 한국에서는 커피를 약하게 마시는 편이라, 에스프레소는 내게 일종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희한하게 여기 이탈리아의 에스프레소는 걸쭉하면서도 목 넘김이 부드럽고 참 맛있다. 내가 커피를 약하게 마시는 이유가 고 카페인을 섭취하면 잠도 잘 안 오고 무엇보다 가끔 속이 쓰린 경우가 있다. 그런데 여기 이탈리아에서는 한 번도 그런 경우가 없었다. 오히려 마치 하루를 시작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잠이 덜 깬 나는 매일 자연스럽게 에스프레소를 찾게 되었다. 정신을 차린 후 숙소에서 짐을 찾아 다시 산타루치아 역으로 향했다. 날이 정말 좋다. 밝고 따뜻해. ‘페라리 기차’라고도 불리는 빨간색 명품 초고속 열차인 이딸로가 우리를 기다린다. 이제는 정말 떠나야 할 시간이다. 베니스를 떠난다는 아쉬움과 동시에 다음 여행지 피렌체에 대한 기대도 몽실몽실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창밖으로 보이는 베니스를 눈에 가득 담아 본다.
아무리 맛있는 초콜릿도 언젠가는 입안에서 다 녹아 사라지곤 했다. 하지만 초콜릿이 녹으면서 내 맘과 몸이 모두 녹아내리던 그 환상적인 경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가장 화려했던 불가사리 초콜릿처럼 더없이 황홀했던 베니스에서의 시간들도 천천히 녹아내려 서서히 내게 스며들 것이다.
여행에 관한 9가지 진실 셋, 경험의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녹아내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