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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Aug 04. 2023

08.04

그냥 일기

8월이 시작되고 벌써 4일이 됐다. 시간이 너무 빠른만큼이나 날씨는 후덥하고 거리를 걷다보면 땀방울이 자연스럽게 보도에 떨어지곤 했다. 어디를 어떻게 가느냐보다 어디를 얼마나 빨리 가냐가 중요해진 거 같은 요즘에 


가끔은 멍 때리며 하늘을 보고 있자니 꼭 내가 뒤처지는 느낌이 든다. 이런 기분은 꼭 우울 같아서 계속 아래로 추락하는데 추락하는 기분은 절벽에서 뛰어내린 것처럼 짜릿하고 아찔하기보단 늪에 빠지듯 더딤인 거 같다. 수요일엔 길이음에 갔다. 청년 길이음이란 길음역 주변에 위치한 문화공간이었다. 대충 편의시설로 얘기하면 될 거 같다. 간 이유는 문보영 시인과 장수양 시인이 있어서다. 


문보영 시인은 2018년 겨울부터 몇 년을 주기로 계속 봤던 거 같다. 물론 일방적인 기억일 것이다. 그가 참여하는 행사에 난 그저 참여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태솔로를 외치던 그녀는(물론 모솔은 아니다, 책에서 연애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새 결혼을 한 사람이 되었다. 


그때 짧게 쓴 시를 여러 사람들이 낭독했었다. 나는 그때


말장난을 좋아했다 끓는 지구라는 말은 꼭 장난 같아서 실감나질 않았고


라고 첫 행을 시작했다. 그때 쓴 시 제목을 08.05로 붙였다. 내일은 하루의 기일이니까. 

이맘 때가 되면 무더운 날씨에 반비례하는 푸른 하늘이 돋보인다. 정말로. 미세먼지도 좋은 지금은 정말 하늘만 보면 완벽한 날인데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주륵주륵 나는 하루니까. 도서관에 피신올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에어컨이 없는 자취방은 생각 이상으로 무더웠고. 선풍기를 틀고 자려니 타이머를 잘 맞출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냥 이불도 제대로 덮지 않고 대자로 누워서 잔다.


기일이 다가오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3일이 하루의 가족 분의 생일이었다는 거다. 이틀 뒤에 동생이 죽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생각만으로도 소름 돋고 아찔하다. 생일 축하의 문자를 보내면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5일이 기일인데 7일에 간다니. 


어젠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특강 비슷한 거였는데 마지막엔 약간 집단 상담처럼 진행됐다. 어떤 한 직장인 여성분은 자신의 고민을 얘기한지 10초도 안 되서 눈에 눈물이 맺혔다. 고민의 경중을 나눌 순 없지만 그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직관적으로 들어왔다. 그가 서두를 떼자 하나둘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단점(으로 보일 수 있는)을 이야기한다는 게 쉽지 않은데


나는 바깥을 바라봤다. 바깥은 여름, 김애란이 생각났다. 비애의 끝을 그만큼 잘 보여준 작가가 있을까. 푸르렀던 하늘이 어느새 검은 물감으로 칠해져 있었다. 밤이 되자 무덥던 날씨가 잦아들었다는 게 느껴졌고


길이음에 에버랜드 오리인형을 두고 왔다. 그때 그 프로그램 참여 조건은 추억의 소지품 1개를 갖고 오는 거였다. 나는 근데 그 물건을 두고 온 거다. 사실 추억은 없었다. 시인들도 무언가 얽힌 추억만이 꼭 추억이 아니라고 했던 거 같다. 


코로나 시국에 문보영 시인을 뵀던 적 있다. 시인의 방을 그대로 구현해둔 어떤 공간이었는데 

그때 시인에게 싸인을 받으며 이런 얘길 했다. 등단하면 밥 사달라고. 아마 정확히는 피자 사달라고 했던 거 같은데 아마 내 생각에서만 멈춘 거 같다. 시인은 유쾌하게 싸인에다 그 내용을 적었다.


지금 생각하니 뭔가 너무 패기 넘쳤던 거 같다. 그리고 등단도 못 했고. 그땐 정말 할 줄 알았다. 대학 4년 동안엔 하지 않을까 했는데 마지막 학기만을 남겨두고 있다. 사실 그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내가 4년을 투자했다면 등단했을 거란 확신이 있다. 그 확신은 자신감에서 나오는 게 아닌 실력에서 나오는 거였으니까. 근데 안일했지. 정말로..


그냥,, 지금은 뭐 졸업작품 전시하는 정도다. 편했던 점은 다른 학우들처럼 몇 번이나 교수를 만날 필요 없었다는 거? 이미 써둔 게 몇 백 편인데.. 30편 통과 받는 거야 뭐


근데 이거로 내가 만족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2020년도까진 수상이 좀 있었던 거 같은데, 몇 년 전부터 갑자기 뚝, 끊겼다. 내가 공모전에 참여하는 비율 자체도 현저하게 낮아진 것도 맞지만 한 해 동안 하나의 수상도 못 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조금씩, 아니 그냥 흥미를 잃었다. 연기에 빠진 것도 있었지만 시에 대한 흥미가 사리진 것도 맞았다. 그래서 나의 기억 속 시인들은 이원하 시인이 마지막 세대가 됐다. 2019년 후로는 관심도 잘 알지도 못한다. 최근에 나온 황인찬 시인의 시집을 옛날의 나였다면 바로 봤겠지만, 이젠 알고도 보지 않는다. 


자기소개서를 작성 중이다. 아무렇게나 써서 냈더니 담당자 선생께서 말했다. 숙지하시고 쓰셨나요?

다시 틀에 박힐 준비를 해야 하는 데, 그게 싫다. 사회의 틀이든, 글의 틀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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