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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Oct 20. 2022

백일몽

나의 사물함에는 꿈이 그득 했어요

그것은 마치 바다처럼 넓었고

난 그 속에서 매일 헤엄을 하곤 했어요

수영을 하다 보면

커다란 조개가 참고서를 먹어치우기도 했고

성적표를 진주처럼 품고 있기도 했어요

저는 액체 괴물처럼 몸을 자유자재로 바꾸며

네모난 모양이 되었다가

네모난 꿈을 꾸었다가

저녁 해가 뉘엿뉘엿 질 때면,

사물함에 자물쇠를 걸어 놓고 방을 나가요

가끔 엄마가 방으로 올라와

애꿎은 자물쇠를 툭툭 건드려 보곤 하지만

비밀 일기장은 비밀로 남아야 비밀이에요

사물함 안에는 또 다른 제가 담겨있어요 

스탠드 불을 켜면

야광 스티커들이 하늘에 별이 돼줘요

자물쇠를 열면 밤하늘을 향해 물고기들이 튀어나와요

지우개, 연필, 참고서, 시험지, 가위 따위의 것들 모두

하늘을 수놓는 별과 함께 춤을 추고

나는 그 순간만큼은 웃을 수 있어요 

자명종이 아침을 불러올 때면

부스스한 머릴 감싸며 눈을 떠요

널브러져 있는 학용품들이 어젯밤을 설명해주는 증거예요

주섬주섬 사물들을 사물함에 넣어놓곤

다시 자물쇠를 잠가요

쉿, 매일 밤만 되면

사물함에서 헤엄을 치곤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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