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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Dec 15. 2023

안녕한 길을 따라 걷다

3. 사랑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문득 삶이 불편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팽이가 돈다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중략)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달나라의 장난」 일부분이다. 어린아이가 돌리는 팽이를 ‘나’는 ‘큰 눈’으로 보고 있다. ‘물끄러미’ 볼수록 팽이는 ‘신기로’운 것이 된다. ‘스스로 도는 힘’이 꼭 ‘어린아해이고 어른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과 닮아서 그렇다. 그런 ‘신기로’운 것은 어쩐지 ‘서러운 것’과 ‘공통’되고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듯 ‘팽이’는 계속 ‘돈다.’


‘어린아해’는 이상의 「오감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어다. 열다섯 작품만이 내려져 오는 「오감도」 연작시에서 열여섯 번째 작품이 있다는 ‘만약’에서 『굳빠이 이상』은 시작한다. 각각의 소설 속 인물들인 김연화, 서혁민, 피터 주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 가까운 인물이며 이들은 기자이거나 소설가이거나 교수로 이상과 얽혀있는 일을 한다. 그중 피터 주는 한국에도 속하지 못하며 미국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이며 자신이 이상의 작품을 통해 한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희망으로 여긴다.


자신의 잘못된 이상은 결국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 데드마스크도 「오감도」도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김연수는 김연화를 통해 말할 뿐이었다. “어차피 둘 다 진짜라고 확실할 수 없는 원고라면 좀 더 그 정황이 진짜에 가까운 원고만이 살아남을 겁니다. 그게 바로 세상의 진실이라는 것이 제가 배운 교훈이었습니다.” 이 말은 진리를 표방하는 것도 세상에 대한 반감도 아니었다. 이상이 자살로 삶을 마무리했든 이상을 위해 김해경이라는 자신을 버렸든 우리가 전해 듣고 읽은 이상은 진실이냐 거짓으로 구분 짓는 게 무의미한 거다. 결국 자기가 유리한 대로 기억하는 게 사람 본성인 듯 말이다.


인간의 이런 편협한 사고방식은 나홍진의 영화 <곡성(哭聲, THE WAILING, 2016)>에서도 잘 드러난다. 외지인을 둘러싼 소문 사이에서 중구(곽도원)는 갈등한다. 일광(황정민)과 무명(천우희) 사이에서 중구는 무명을 의심한다. 신을 의심한 중구의 최후는 효진(김환희)이로 하여금 끔찍한 비극을 맞는다. 중구는 마치 베드로를 연상시키지만 중구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부성애가 가득한 인물인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신의 뜻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은 그리스 비극 같아서 중구 또한 효진이에게 최후를 맞는다. 


영화 <곡성>은 외지인을 악마로 그려내기 위해 소문 혹은 꿈이라는 소재와 맥거핀을 적절하게 사용했다. 결국 중구는 악마에게 현혹된 것으로 보이며 무명이라는 수호신을 저버린다. 영화 전체를 환상적으로 그려냈고 끝내 관객에게 미끼를 던지고 물리게 하는 데 성공한 이 작품은 앞서 얘기한 『굳빠이 이상』과 닮아있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것일까. 김연화는 자신의 결핍된 사랑을 이루고 싶어 했기에 상황 자체를 진실로 바꾸려고 했다. 진실로 만드는 일의 최후는 기자 생활에 발을 내밀지 못하는 거였지만 사랑을 쟁취하는 방법은 알아냈다. 만약 데드마스크에 현혹되지 않고 피터 주의 논문을 먼저 읽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서사다. 서혁민은 자기 삶이 아닌 이상으로 살길 원했다. 그가 쓴 수기를 누군가 진짜 이상의 유작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말이다. 주 피터가 한국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은 미끼 그 자체였다. 떡밥에 물려버린 주 피터는 현혹되듯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급급해진다. 모든 주인공에게 결핍된 무언가는 무엇인가에 현혹된 모습을 보인다. 그들에게 이상은 이미 ‘굿바이’된 상태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엔 이상의 옆을 함께하는 듯하다. 이상을 도구로써 이용해도 말이다.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는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과 닮아있다. 번역하는 중 무의식에 자리한 것일까. 아니면 이상을 원했던 다른 인물들처럼 무언가 현혹된 걸까. 그럼에도 「모두에게 복된 새해」에서 인도인 싱어와 ‘나’의 만남은 외지인과의 화합 내지 사랑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 싱어에게 내미는 다정한 악수 같았다. 꼭 싱어가 즐겨말하던 ‘그치’라는 말처럼. 



*이 시리즈는 연작입니다.

**이근화, 『고독할 권리』에서 차용 (현대문학,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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