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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중간고사 생활

그냥 일기

by 수호


지금은 시험기간이다. 중간고사 말이다. 벚꽃의 꽃말은 누가 중간고사라고 했는데 진짠 것 같다. 4월 말에 대부분의 중고등학생들은 시험을 시작하고 마친다.


시험 기간에 맞춰 학원은 덩달아 바빠진다. 아직 덜 나간 진도를 빠르게 나가야 하고 직보(직전 보충?)도 해야 한다. 나의 경우엔 화목만 수업이었는데 일요일에도 나간다. 그러고 수요일에도 직보를 위해 나가고.


학원 생활은 평화롭다. 아이들은 대부분 적응했으니까. 다만 범위에 맞춰서 내가 공부를 다 못하고 있다는 문제가 있다. 감기까지 찾아온 탓에 정신력까지 흔들고 있다. 중학생 수업에선 상관 없지만 고등학생 수업에선 사실 나도 벅찬 부분이 많다. 고등학교 후로 안 배운 내용이니까. 나는 사범대도 교육 관련 학과도 나오질 않았으니까.


고 1의 경우 문법을 배운다. 음운부터 시작하는데 이 부분은 항상 재밌다. 나도 먼저 준비하지 않으면 모르는 부분이고 사실 이렇게 나열하다 보니 국어는 준비할 게 많다. 지문을 읽어도 교과서가 8개니까 8 지문을 읽는 거다. 그리고 교과서마다 다르지만 문학 작품이 정말 많이 실린 게 있다. 소설의 경우 특히. 소설의 전문을 교과서에 담으려는 노력을 볼 때마다 나는 슬퍼지게 된다. 그냥 좀 중략 해주지.


그런 상황 속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정말 끔찍하다. 400페이지에서 500페이지 정도 되는 벽돌책인데 매주마다 읽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문제는 한 번 밀리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거였다. 내일까지 1500페이지 정도를 읽어야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는 걸까 싶다. 이런 상황이 닥쳐오자 안 읽고 싶어지고 안 하고 싶어진다.


오늘 무던히 읽어도 해내지 못한다는 느낌 탓일까. 어쩌면 이런 게 사표 심리일까. 내가 투표한 후보자가 탈락하는 기분? 사실 사표 심리에 대해서 나는 무지했다. 사표가 되는 걸 알아도 난 상관 없었으니까. 일부로도 무효표를 던지곤 하는데 사표가 뭐 대수인가 했다.


그런데 어떤 친구가 그랬다. 표를 왜 던지냐고. 어차피 당선 안 될 거 알잖아. 나는 후보자 10여 명 중에 대통령 한 명보다 그 사람의 투표율이 중요하다고 봤다. 그것은 단순히 소수의 지지자로 표기되는 숫자가 아닌 그 이상을 내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정치 얘기는 예민한 것이기에 가족끼리도 하지 말라고 한다. 사실 이 말에 대해서도 한 선배는 통찰적인 시선을 보여줬다. 정치 얘기는 가족끼리도 하지 말라는 건 단순히 금기하는 게 아닌 예민한 사안이기 때문에 가족이랑 대화할 때도 조심해서 해야 된다고. 맞는 말이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거는 도피 아니면 애써 무시하는 것에 불과한데.


학교 건물 6층 로비에서 브런치를 쓰자 뭔가 의식이 됐다. 학우들이 내 노트북 화면을 보면 어떻게 하지 싶어 화면의 조명을 낮췄다. 덕분에 나도 좀 흐리게 보게 되지만 마음이 편해졌다. 왜일까. 열차 안에서는 이 정도로 의식되진 않았는데. 이제 문창과 로비에선 나를 알아볼 학우들은 없을 텐데.


밀린 영화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대부분 학생이라 중간고사가 끝나고 작업을 시작한다고 한다. 5월부터 시작되면 여름엔 정말 완성될 것 같다는 희망이 생긴다. 영화의 프로덕션이 끝났던 1월엔, 여름에 새로 찍을 영화를 생각했는데, 이건 정말 허상이었다. 앞에 작품도 완성 못 시켰는데 후속작이라니.


화요일엔 중3 학생과 고3 학생만을 가르친다. 쉬는 시간에 복도로 나가면 중1 학생들이 있다. 얘내들은 쉬는 시간이든 수업 시간이든 언제든 항상 돌아다닌다는 신기한 족속인데 나를 마주치면 다들 일관된다.


쌤, 고마워요 해주세요.

목요일에 해줄게요.

넵.


대화를 일단락 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얘내들은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다. 들어주면 좋아, 근데 안 들어줘도 돼라는 마인드 같기도 하다. 무조건 들을 거야, 이런 게 아니기에 부담은 덜 되지만 마주칠 때마다 그러니 이제는 당황스럽지도 않다. 익숙해지고 있는데 뭔가 이상하다. 근데 하나 부담이 생겼다. 고마워요, 해줬더니


어, 이게 아닌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빠져 나왔지만 속으론 동요했다. 어, 이게 아니라고? 그럼 뭐지. 이상한 기대감이 생긴 탓에 나는 긴장하게 됐다. 내일 학원에 가면 분명 불 보듯 뻔한


고마워요 해주세요.


수업을 들을 생각은 없다. 시험도 안 치는 자유학기제인데 수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숙제가 아니면 책을 절대로 펼 생각은 없어 보인다. 물론 나도 그랬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80분이나 되는 수업 시간을 집중시킬 수 없다는 거다. 사실 일찍이 포기해야 했다. 나도 80분 집중 못하는데 중학생한테 그걸 바라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어떻게든 집중 시키게 만들어야 하는데 나도 그 방법은 여전히 잘 모른다.


재밌는 거라고, 나름 준비해 가도 관심 없는 건 똑같다. 얘내가 관심 보이는 건 그림이나 밈? 정도였다. 수업을 하다 어떤 애가 칠가이 그려주세요, 라고 했다. 그래서 칠판에다 칠가이를 그려줬더니 좋아했다. 이게 너무 이해가 안 됐다. 참고로 나의 그림체는 엉망이다. 그런데 그 엉망인 그림을 좋아하는 거였다.


쌤, 눈이 왜 저래요.

쌤, 저거 그냥 ** 아니에요 (뭐라는질 모르겠다)

쌤, 다리는 왜 두 개에요?


고양이나 강아지 그림을 그려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아, 청각적인 것보단 시각적인 것에 관심 가지는구나. 이래서 수업 시간에 영상을 틀고 그러는 거구나. 덕분에 나는 마루 그림을 따라 그리곤 학원에 가곤 했다. 네이버 웹툰에 존재하는 마루는 강쥐.


내일은 또 무슨 수업할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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