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일기
요즘 부쩍 핫한 게 생성형 인공지능을 통한 지브리 이미지 만들기 아닌가 싶다. 사실 이것도 정확하겐 유행이 좀 지난 느낌이 든다. 한 달 전만 해도 정말 핫했고 매스컴에선 GPU나 저작권 등의 문제를 일삼았다. 그러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인터뷰 영상을 봤다.
사실, 여기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얘기를 더 꺼낼 생각은 없다. 익히 알 것 같은 사실이기도 하고 그냥 우리가 간과한 것들에 대해서 한번 되짚어 보고 싶었다. 저작권, 사실 대유튜브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무지할까. 당장 생성형 인공지능이 일상에서 자리 잡은 건 몇 년 되지 않은 사실인데 우리의 많은 것들이 바꼈다.
그 중 하나는 과제나 숙제다. 사실 이 부분에서의 문제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저작권. 물론 생성형 인공지능은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아오는 만큼 출처를 잘 표기하긴 한다. 하지만 문제점 중 하나는 AI를 이용하여 글 썼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심리다. 그렇기에 생성형 인공지능이 찾아온 출처뿐 아닌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었다는 글의 내용 자체를 자기가 쓴 글처럼 변모시킨다.
이는 만연한 문제가 됐다. 오죽하면 AI가 쓴 글인지 판독하는 AI가 나왔다. 이것이 비단 학생들한테만 해당되는 문제일까. 회사원들은 생성형 인공지능을 본인 맞춤으로 잘 탈바꿈한다. 공문과 같은 형식화된 글을 쓸 때는 챗지피티의 효율성이 최상으로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공문 형식의 글엔 어떠한 출처도 표기하지 않아도 되고 어떤 누가 썼든 비슷해 보이기까지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을 통해 저작권을 망각하고 있다. 나아가 대화까지. 생성형 인공지능한테 상담을 받으라는 말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누구보다 공감해주고 마음을 이해해주는 친구로 쓰이니까. 사주 상담을 받을 때처럼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생성형 인공지능은 정말 고효율적인 친구가 됐다. 이게 진정한 친구인진 사실 의문이 든다.
학원에서 근무하는 나는 중학생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동물의 기본권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회는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도래할까? 학생들은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들었다. 곧 나오는 대답은 챗지피티가 작성한 문구 그대로였다.
그 생각의 출처는 본인도 아니었고 출처도 알 수 없는 인터넷 상의 글이었다. 잘 짜였지만 중립적인 의견. 동물의 기본권은 중요하지만 현대 사회에선 아직 섣부른 이야기라는 것. 교과서적일 만큼 도덕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어떤 생성형 인공지능을 쓰든 비슷한 말이 나왔을 거다.
도파민에 절여진 Z세대에겐 생각하는 힘은 점점 줄어드는 듯하다. 도파민 자극에 예민하고 틱톡과 탕후루에 빠진 우리들에게 달콤함은 계속 삼키고 싶은 것이고 씁쓸한 것은 뱉고 싶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씁쓸한 것은 생각에 해당할 것이다. 감탄고토라는 사자성어는 굳이 기억할 필요 없는 말이 되었다. 어떤 정보가 궁금하면 이젠 생성형 인공지능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물론 이러한 사실이 인터넷 검색하던 시대랑 뭐가 다를까 한다면 그건 분명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터넷에서 찾아오는 무분별한 정보들의 출처는 그 정보를 작성한 사람의 저작권은 누가 보호해줄 것이냐는 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그림체는 사람들의 노고를 AI는 단 기간에 무너뜨렸다. 이는 비단 저작권의 중요성을 떠나 사람의 노력 자체를 부정하는 거다.
이런 이미지가 보급되기 전엔 가수의 목소리로 노래를 커버하는 AI 영상이 유행했다. 내가 본 영상 중엔 십센치의 권정열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로 커버한 노래를 보며 조용하게 읊조렸다. 이 목소리 만들려고 몇 년이 걸렸는데.
우리가 재미 삼아 혹은 쉽게 하려고 사용한 인공지능이 어쩌면 노력의 퇴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나아간다면 Z세대들이 대한민국의 중장년층이 되었을 때 우리나라엔 개성이 없어지진 않을까. 모두가 획일화된 사람으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김수영의 <북어>라는 시처럼 우리 모두 다 그런 사회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