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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마지막

그냥 일기

by 수호


4월의 마지막이다. 이젠 5월을 앞두고 있다. 봄도 이젠 꽤나 더워져서 낮엔 여름 같기도 하다. 물론 아직 여름이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거겠지만. 올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까.


나는 매달 인스타 피드를 올린다. 최소한의 관리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제 올릴 게 없다. 이번 달은 넘겨야지.. 뭐. 근데 이제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 안 올리게 되겠지.


선배들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다들 인생이 하드한 것 같다. 직무와 맞지 않는 일에 고생하는 선배,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돈이 안 되서 힘드는 선배.


선배는 내게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하고 싶은 거라, 어려운 말이었다. 정확히 하고 싶은 게 뭐냐고. 이젠 어린 나이도 아닌데 여전히 방황하는 것 같긴 하다. 공부 잘하고 좋은 대학 들어가면 길이 열릴 것처럼 어른들은 말했었는데 27살을 먹고 대학을 졸업하니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됐다. 되게 허울 좋은 말들이었다는 거.


사실 기준은 없는 건데.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하고 그러면 되는 건데, 그게 어렵다. 어쨌든 돈은 필요하니까. 사실 내 적성에 맞지 않아도 살아갈 방법도 있고 먹고 살 방법도 있다는 건 알지만 타협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대학원에선 어떤 선생이 내게 말했다. 연영과 학생 같다고. 나는 뭐라 말해야할지 몰라서 감사하다고 했다. 근데 그렇게 보이는 게 당연할 것 같긴 하다. 나의 습성은 이제 문창과보단 외부 과에 가까우니까. 사실 다시 문창과 학생들의 관습에 익숙해진다는 게, 학부 때도 그렇지 않았다는 걸 실감했다. 난 여전히 사람을, 사람들을 잘 모르겠다. 문창과 학생은 더욱더.


사실 착한 친구도 되게 많은 과인데, 예민한 감수성이 감당되질 않는다. 나 또한 예민하기에 아마 그런가 보다. 오늘은 학원에서 직전보충을 했다. 고2와 중2 학생들.


고2 학생들은 해맑았다. 남자 학생 두 명인데 정말 해맑다. 공부와도 조금은 거리가 있는 친구들이기도 하다. 그 친구들을 보면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건강하고 행복해 보여서. 사실 사교육에 임하지만 공부가 그렇게 중요할까, 대학이 그렇게 중요할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언에듀케이티드가 고등래퍼에 피처링 나와서 뱉은 가사가 있다. 학부모님들 죄송한데, 공부 같은 거 안해도 우리 행복할 것 같네요.


대학원 싸강이 있다. 대학원생 길라잡이라고. 오늘자 싸강을 들어가니 피피티에 그런 말이 있었다. 도피성 진로. 대학원을 도피성 진로 선택으로 하는 친구들이 있고 그렇게 보는 시각이 있다는 거였다. 찔렸다. 내가 진짜 도피성 선택이었구나 싶어서.


그런 내가 학원에서 국어를 가르친다는 거 여러 생각이 들게 한다. 중2 학생들을에겐 남은 시간 자습을 시켰다. 그러자 책을 꺼내 읽는 아이가 있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달과 6펜스, 웃는 남자 등 아이들이 문학을 읽는다는 게 신기했다. 뭐지? 갑자기 왜 책을 읽으려는 걸까 싶었다. 아무도 국어 문제에 대해선 묻지 않았고 묻는 아이도 수학 문제를 물을 뿐이었다(?) (나는 국어 쌤이다)


어떤 날이었다. 쌤은 공부 좋아했어요?라고 묻길래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그럴 것 같다고 대답했다. 국어를 좋아했냐고도 묻길래 아니라고 했다. 그럴 것 같다고 또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 걸까. 어떤 한 여자 아이는 내게 꾸준하게 말한다. mbti 검사 다시 해보라고. 100프로 T가 나올 거라고 했다. 나의 mbti는 infp이다. 그 아이에겐 단짝 친구가 있는데 하루는 내게 자기 시험이 망할 것 같다고 한탄했다. 나는 고3 수업을 준비 중이었기에 말의 끝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들어줬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게 뭐에요, 라고 했다. 그러곤 고3 학생이 들어왔기에 그 친구는 바로 나갔고 그 아이는 내게 이제 고민을 털어놓지 않았다.


대학원에선 김병곤 얘기가 나왔다. 사실 누군지도 몰랐고 얼마나 이슈가 있었는지도 그날 알았다. 오토픽션. C누나. 당사자성. 시간이 지나고 그 사건을 봐도 뭔가 이상했다. 문학동네에서 돌아온 김병곤에 대해 단 평론을 읽었다. 가해자였던 김병곤과 피해자였던 C누나. 그 선상을 4년 지나 지금 돌아보면 김병곤 또한 피해자의 위치가 아니었을까 하는 글이었다. 이 상황엔 물화된 문학, 문학계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김병곤이라는 소설가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것도 상을 빼앗은 것도 문학계였고 이는 그를 물건(도구)으로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사실 이 생각에 대해선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또한 지금으로 따지면 오토픽션에 가까울 것이다. 200년 전의 이 작품은 그런 당사자성 논란을 불러일으키질 않았다. 그 이유는 뭘까.


사실 김병곤의 소설을 안 읽어본 사람으로서, 또한 그때 그 이야기를, 이슈를 접하지도 관심도 없었던 사람으로서 할 얘기는 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더 나아갈 길이 많이 남았다는 느낌만은 지울 수 없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iLuJHShuN4&list=OLAK5uy_l7NkgHrBTaEaSydms3cMIl-7Ojj4xinXA&index=12


나는 검정치마의 앨범 중에서도 썰스티를 가장 좋아한다. 그냥 썰스티 앨범을 40분 듣는 이게 뭐랄까. 하나의 루틴이 되기도 했다. 군대 시절부터 나는 썰쓰티 앨범을 들으면서 자는 걸 좋아했다. 딱 40분간 듣고 잠에 빠지고.


그래서 이제는 사실 뭐랄까 감흥이 덜하다. 그런데 항상 마지막 트랙에 다달으면 35분 간 들었던 노래가 리셋되는 느낌이다. 마지막 트랙에선 감정이 갈아앉는 느낌이랄까.


학원은 사실 녹록치 않다. 중2 학생들에겐 잘해준다고 잘해줬다고 생각하는데 점점 선을 넘는 것 같기도 했다. 원장 쌤이 처음에 말한 게 기억난다. 선생은 재밌거나 카리스마 있거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고. 나는 이도저도 아니었다. 처음에 기강(?)을 잡았어야 했는데, 근데 그게 내 가치관과는 너무 맞질 않다. 인문학을 배우질 말았어야 했는데.


아이들은 종종 00이 어떻냐고 묻는다. 난 그럼 일관되게 대답한다. 00이지. 아이들은 잘못 들은 것처럼 다시 묻곤 하는데 그러면 나는 틀어둔 라디오처럼 똑같이 대답한다. 누가 예쁘냐, 어떻냐에 대한 대답은 답변도 안 하려고 한다. 그냥 그게 내 가치관이다. 걔는 착해, 예뻐, 공부를 잘해 이런 건 물론 그러한 특징일 순 있지만 그게 그 아이를 대변할 순 없다. 그냥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우리는 우리고.


아이들은 종종 자기들끼리 장난칠 때 이런 표현을 쓴다. 동성애자처럼 뭐하는 거야, 게이 같아. 게이처럼 굴지마. 주로 이런 말을 쓰는 건 남자 애들이긴 하다. 중1, 중2 남자애들은 그 말이 담긴 의미를 사실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여자 아이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다. 안경을 쓰면 눈이 작아 보인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에서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둔 사회는 여전히 병적이라는 사실이 투영된다. 그리고 이젠 나도 그 사회를 일군 어른 중 하나가 됐다. 이제 더는 어른들을 탓할 수 없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된 거였다.


고2 친구는 내게 오늘 이런 얘길 했다. 자기는 여름에 에어컨이 너무 필요하다고 했다. 근데 그러면 교실에선 여자 애같은 남자 애들이 에어컨을 끄자고 얘길 한다고 한다. 여자애들이 추워한다는 걸 자기네들이 대신 전하는 거라고. 그 친구의 말에선 이미 어떤 선입견이 보였던 것 같다. 단지 그걸 내가 언급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와 내가 그래도 되냐는 생각. 결국 난 그 부분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냥 듣기 좋은 이야기들을 하며 흘러보냈으니까. 에어컨, 사실 나는 학창 시절에 교실 안에가 추워서 저지를 입던 학생이었다. 근데 나는 조용했던 학생이기에 긴팔을 입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에어컨 온도 18도에 맞춰서 덥다고 땀을 흘리는 주류 학생들에 동화되는 선택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중1 남자 아이들이 나를 꽤 좋아한다. 사실 이유를 어느 정도 유추하고 있긴 하다. 아마 양아치 같은 내 인상을 좋아하는 느낌이다. 그 나이 아이는 센 사람에 대한 환상이 있는 것 같다. 나에게 물구나무를 설 수 있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다. 덤블링도 되냐고 물었다. 그건 안 된다고 했다. 백덤블링은 되냐고 물었다. 안 된다고 했다.

수업 중 내가 팔을 걷자 아이들이 내 팔을 봤다. 쌤, 개 세보여요. 이게 무슨 말인가 했다. 내 팔을 보고 있는 걸보자 핏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냥 말라서 있는 건데.


저 나이의 학생들 사이에선 아마 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거다. 어쨌든 살이 포동포동할 때기도 하고. 뭐, 내가 사실 중1에겐 친절하게 굴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좋아해주는 건 고마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중1 남자아이들은 정말로 댕댕이 같아서 수업 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목줄이 풀리기만을 기다리는데


쌍둥이 친구들에겐 아이쇼 스피드가 우상인 듯했다. 자기도 스피드처럼 덤블링하고 싶다고. 그래도 내가 학생 때처럼 철구, 신태일 이런 친구들이 아니라 다행인 듯도 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사실 bj를 잘 몰라서 스피드도 철구도 신태일도 잘 모른다. 이 또한 내 선입견이란 점에서 할 말은 없다.


전주국제영화제가 개최한다고 한다. 전주국제영화제 공식작 중 하나로 <저 구석 자리 주세요>가 있다. 나는 그 실험영화에 단역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초대는 받지 못했다. 가고 싶은 마음에 인스타 스토리에 슥 올렸다. 디엠이 왔다. 같은 연기하는 친구들. 결국엔 귀결되는 얘기. 우리 더 높게 올라가자. 다음엔 떳떳하게 가자.


작년 부국제 때도 그랬다. 단역이라서 슬펐던 그 경험. 나도 영화제 가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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