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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4

그냥 일기

by 수호


생각하니 나는 나름 브런치의 고인물이었다. 쓴 글도 100여 편이 넘어가고 가입한지도 생각보다 됐다. 물론 이 생각보다라는 말이 너무 상대적이긴 한데, 내 입장에선 그렇다는 것이다. 나름 꾸준하게 끄적거렸고.


어젠 비가 오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비는 안 오지만 전체적으로 흐리다. 그래서인지 날씨도 반팔을 입기엔 쌀쌀한 날씨였다. 도서관에 가서 끄적끄적, 사실 오늘은 늦잠을 잤다. 일어나니까 12시 경이었고 토요일의 12시간밖에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알람을 맞추질 않고 자자 이렇게 됐다. 그렇다고 평소에 잠을 타이트하게 잤다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피곤함은 원래 디폴트라 신경 쓰지도 않았고.


비대면 오디션을 준비 중인데 벌써 시간이 24일이나 됐다. 처음 연락을 받을 때만 해도 약 10일 정도의 데드라인이 있어 여유로웠는데 벌써 내일 마감이라니. 영상을 찍어서 보내야 하는데 아직 대사가 입에 붙질 않았다. 하핳, 기회를 줘도 못 먹는 나였고


최근엔 친구에 대해 만남에 대해 고찰했다. 나이가 들수록 확실히 친구는 좁아지고 적어졌다. 대학원 생활을 하다 보니 더욱더 그렇게 된 것 같다. 대화를 하지 않게 됐다. 알바하는 곳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외롭다고 일회성 만남을 하는 건 근본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결국은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있거나 해야 해결될 문제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성친구는? 물론 도움은 될 터지만 이 또한 잘 모르겠다. 기간제 베프라는 말이 있다. 연인을 기간제 베스트 프렌드라고 말하는 거였다. 헤어지면 친한 친구를 잃는다는 말로 순화시키면 더 이해가 될까. 나는 그 말이 너무나 공감 됐다. 대화를 할 사람이 사라졌고 어딜 갈 친구가 사라졌다.


그런데 최근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사랑에 대해 생각도 많아졌다. 마르셀(책 속 화자)은 알베르틴을 잃고 아파한다. 첫사랑이었던 질베르트와 헤어질 때와 다른 감각이었다. 알베르틴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는 만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알베르틴은 죽게 된다. 마르셀은 만날 가능성 조차 없어지게 되자 더욱더 아파하고 슬퍼한다.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할 때와는 분명 다른 스탠스다.


이렇게까지 아파하는 사랑은 뭘까. 교수자는 그런 사랑을 해보라고 했다. 그런 사랑?


그런 사랑은 뭘까. 마르셀은 질베르트와 헤어지자 어떠한 얘기도 듣기 싫어한다. 심지어 여행을 가서 환기 좀 하라는 얘기에도 진지하게 반응한다.


스완이 파리에서, 특히 내가 괴로워했을 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네는 오세아니아 주의 아름다운 섬으로 떠나야 하네, 그러면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걸세.” 그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면 따님을 보지 못할 텐데요. 따님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물과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야 할 텐데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권, 56-57쪽.


그런데 알베르틴의 죽음 소식을 들었을 땐..


만남 가능성이 없다는 건 잔인한 일이다.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 옛 연인과 그렇지 않고 생을 마감한 옛 애인은 다른 느낌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건 뭘까.


최근엔 에브리타임을 통해 익명으로 쪽지(메세지)를 주고 받은 적 있다. 그는 사랑을 할 때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야 후회가 안 남는다고 했다. 나는 그 자세가 궁금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면, 더 잘해줄 수 있었다는 미련이 남는다는 거였다. 미련이 남는 게 싫다고 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태도에 신념이 있어 보였다.


해방촌의 한 독립 서점을 간 적 있다. 서점에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달려왔다. 뚱냥이였다. 덩치가 좀 큰 고양이여서 뛰어오는데 무섭기까지 했다. 그는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한 채 서점 안으로 달려 들어가서 누웠다. 다른 여자 손님이 손을 건네자 애교를 부리기까지 했다. 나도 손을 내밀었는데 냥냥펀치를 맞았다. 기분이 나빠졌다.


동물권 동아리 방을 구경갔다. 캣초딩이 있었다. 고양이는 방 안에만 있었던 탓인지 사람이 오자 신나 보였다. 스트레칭 후 미친 듯이 날뛰었다. 내 옷자락을 물고 뜯고 발톱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장난감으로 시선을 유인하려 했는데 그는 지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더욱더 놀기를 원해 보였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는데 진심으로 무서워졌다. 생각보다 발톱이 아팠고 이빨로 문 곳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양이는 자기가 원하는 만큼만 다가간다. 댕댕이처럼 헌신적이고 사랑을 온전히 주는 동물처럼 보이질 않았다. 그런 고양이가 사랑한다는 것과 댕댕이의 사랑은 본질적으로도 달라 보였다.


자취하는 곳 주차장엔 나비라는 고양이가 산다. 빌라 바로 앞 과일가게 아저씨에게 어느 순간 나비는 따르게 됐다. 나비가 새끼인 고등어(가명)를 잃고 난 후부터였다. 나비는 새끼 다섯 중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으니까. 사람 손을 탄 것은 아니지만 과일가게 앞에서 누워있기도 하고 아저씨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나비도 처음부터 사람에게 몸을 맡긴 것은 아니었다. 아마 고등어의 죽음이 어떠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 사랑을 한다는 건 무슨 조건이 필요한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랑의 방식은 분명히 변한 것 같았다. 나는 고양이처럼 예민하고 조심스럽다. 사람을 만나는 덴 힘이 필요하다. 문제는 정이 많다. 거절도 여전히 잘 못하고.


아무리 시니컬해지려고 노력해도 어렵다. 나는 모르는 남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걸 잘 못한다.

오늘도 혼잣말을 많이 끄적거렸다. 그냥 그렇다고.

누군가에겐 어쩌라고라고 할 말들 뿐일 텐데, 나도 잘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삶에선 어쩌라고 말할 자신감이 더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고양이처럼 마음에 안 드는 상대에겐 냥냥펀치를 날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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