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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져요

그냥 일기

by 수호


기말고사가 한 달 남지 않았다. 이번 주부터는 토요일에도 학원에 출근한다. 11시부터 16시 20분까지인데 중1부터 고2까지 학생들이 있다. 그러니 쉬지 않고 수업해도 모두를 가르치긴 부족한 시간이다. 특히 국어라는 과목의 특성상 지문이 걸린다.


학생들이 지문을 꼼꼼하게 읽어오는 게 일단 우선이 되어야 하지만 실상 제대로 이루어지질 않는다. 특히 소설에선 그게 문제가 된다. 문제를 풀 수도 무언가 개념을 주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행은 텍스트 읽기다. 내가 생각하는 문학은 창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안 읽고 무언가를 쓴다는 건 못 배운 거라고 생각한다. 많이 읽고 배워도 제대로 된 글은 쓰기 어려운 것이니까.


뭐 이 얘길 하면 괜히 시비만 붙을 테고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려 한다. 오전 11시까지 출근이니 더 더워지기 전에 아침에 일찍 나섰다. 10시가 좀 넘어서 걸어가려고 했다. 걸어갈 거리는 25분 안팎의 거리지만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힘들었다. 학원엔 10시 40분에 도착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원장 쌤과 마주쳤다. 어색한 인사 후 엘리베이터는 침묵했다. 그 좁은 공간 속 둘이 침묵만을 공유하는데


원장 쌤이 서두를 뗐다.


쌤, 00이 아시죠?

네.

걔가 1교시가 뭐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과학이라고 했더니 걔가 뭐라했는지 알아요?

..?

왜 과학이에요?

??

국어부터 해야지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에요.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아 진짜요?


원장 쌤은 이어서 말했다.


네~ 00이가 국어 쌤 되게 좋아해요.

엘리베이터엔 웃음이 가득했다. 뭐, 그렇게 폭소하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아침부터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수업은 잘 안 들어도 수업을 싫어하진 않았구나.

귀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중학생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수학 경시대회도 있던 탓에 학원은 시끌벅적했다. 경시대회가 끝나자 학원은 더욱더 시끌벅적해졌다. 원장 쌤은 경시대회를 치룬 학생들에게 베라 아이스크림을 사 줬다. 국어 수업을 듣던 아이들은 문 밖의 그 상황을 보게 되었다.


쌤, 쟤내들 베라 먹어요.

그래요?

쌤, 배고파요.

쌤도 배고파요.


잠시 화장실에 들리기 위해 나는 반에서 나갔다. 그러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남자애가 나에게 다가왔다. 저 84점 나왔어요.


..우와!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 칭찬해줬다. 누군지 모르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내 반응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건지 마저 말했다.


저 전에는 86점이었는데.


뭐지, 기출 변형 문제인가. 84점이 잘해서 말한 게 아니었나? 아이는 관심이 없어진 듯 홀연하게 떠났다. 엄마는 외계인을 먹으면서.


고등학생 수업이 오후에 시작됐다. 수월하게 잘 진행되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내 체력이었다. 중1부터 중3한테 너무 기를 빼았겼던 것 같다. 고1 수업까지 마치자 고2 때는 너무 힘들었다. 고2까지 마치고 나자 입에서 피 맛이 났다. 출처가 어딜까. 입 안 어디선가일 텐데, 목인지 이빨 쪽인지 가늠이 안 왔다.


끝나고 감자탕 집에 갔다. 평소 뼈해장국이 괜찮게 나오는 곳이어서 좋아한 가게였다. 애매했던 시간 탓인지 손님이 없었고 난 구석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한 손님이 이어서 들어왔고. 내가 주문한 뼈해장국이 나올 쯤에는 가게가 70프로나 찼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손님을 끌고 온 느낌이었는데.


뼈해장국 맛이 전과 달랐다. 분명 난 지금 배고프고 지쳐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상태인데 왜 이럴까 싶었다. 분명 여기 맛있는 곳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게 먹었다. 그렇지만 전과 다르게 2프로 아쉬움이 남았다. 뭐가 부족한 걸까 생각했지만 도저히 모르겠다.


다시 25분을 걷자니 너무 힘들었다. 날씨 앱을 보니 29도였다. 저녁 시간인데 왜 이럴까. 너무 지쳐서 코노에 잠깐 들렀다. 천 원에 두 곡이라. 잠깐 스트레스 풀고 가면 되겠지.


밖에 나왔지만 여전히 더웠다. 가는 길에 도서관에 들렀다. 프린트를 하고 땀을 식히려고. 도서관장과 마주쳤다. 다음 달에 강연이 있으니 오라고 말씀하셨다. 하핳.


해피오더에 들어가서 쿠폰을 받았다. 파리빠게트 7000원 할인. 좋다고 담고 픽업까지 마치자 실감했다. 물가에 대해서. 빵 몇 개 안 담았는데 이게 17000원 치라고?


집에 돌아오자 녹초가 됐다. 인터넷에 들어갔다. 아, 오늘 퀴어 축제였구나. 퍼레이드도 했네. 행진.. 이 날씨에 3키로나 걷다니 더웠겠다 싶었다. 어젠 전쟁이 났었다. 이란과 이스라엘. 내가 평화롭게 자는 동안 세계 어딘가에선 죽고 죽이는 전쟁 중이었구나. 어쩐지 미국 주식이 엉망이 됐더라.


월급이 들어왔다. 월급 날은 내일인데. 공휴일이라서 오늘 준 걸까. 예상보다 더 들어와서 조용하기로 했다. 아님 주휴수당 포함된 금액인가. 모르겠다.


다음 주에 있을 오디션과 단편영화 촬영이 있다. 나사렛 대학교와 수요일에, 인덕대학교와 월화. 오우, 기말과제도 다음 주까지인데. 일복이 터졌다.


나는 내가 머리가 나쁘지 않다고 믿었던 적 있었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가고 생각이 바꼈다. 그리고 대본을 받아도 자신이 없어졌다. 솔직히 대사를 난 잘 외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젠 대사도 잘 못 외우고 있다.


읽을 책은 10여 권이 넘게 남았고 소논문은 두 편을 써야 하는데. 사실 이렇게 브런치에 끄적이는 것도 사치이고 코노에 간 것도 사치인데. 시간은 부족한데 그럼에도 또 몸은 힘들어서 축 늘어지고 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고양이를 만났다. 별 생각없이 다가갔는데 카페에서 한 여성이 웃고 있었다. 고양이를 보면서 웃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웃음이 고양이와 나, 어딘가 경계가 없다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고양이 앞에서 난 아무 생각없이 물을 마셨다. 얘도 더울려나, 이 정도 생각까진 한 것 같은데


그때 그 여성이 카페에서 나와서 말을 꺼냈다. 물 줬어요.

여전히 웃고 계셨다. 아, 내가 고양이 물 주로 온 줄 알았구나. 그래서 기특한 마음에 웃고 계셨던 걸까 싶었다. 나는 머쓱하게 돌아왔다.


또 다른 곳에서 고양이 달이와 별이를 봤다. 여전히 뚱뚱한 달이와 살이 많이 빠진 별이. 그리고 고양이들이 누운 곳을 꼭짓점 따라 선을 그으면 삼각형이 될 자리에 한 아이가 울고 있었다. 저 삼각형 구조는 뭘까 생각했다. 남자아이는 엄마에게 더 놀고 싶다고 울었다. 엄마는 말없이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떼를 썼고 소리가 커지자 고양이들이 귀를 한번 쫑긋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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