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일기
내일부터는 날씨가 영하로 떨어진다고 한다. 정말 영락없는 겨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가을과 봄이 정말 짧아진 것 같은데 우리가 환경에 대해 무지했다는 걸 실감하게 된 순간이다.
어젠 충무로 독립, 단편영화제 시상식에 갔다. 충무로 영화제라면서 장소는 약수역이었다. 물론 같은 중구이긴 하지만 동국대 정도는 나와야 충무로 아닌가. 약수역에 위치한 청소년센터였고 그 안에 위치한 청소년 극장이었다. 작은 극장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많았다.
생각보다 재밌었다. 조명이 켜지지 않는다고 화내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운영위원장? 그런 사람 같았는데 모자를 벗으며 사과했다. 모자를 벗자 어떤 조명보다 화려한 대머리가 빛났다. 머리 숙여 인사하는 자세를 보며 어른스러워 보였다.
시상식장 안은 조금 더웠고 복잡했다. 그래서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안경 쓴 남자가 나에게 인사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진 모르겠고 나이대는 대충 20대에서 30대 정도로 보였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하는 순간, 그가 먼저 말했다. 영화에서 봤다고.
아. 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랐다. 그가 이어서 화면에서 보다 실물로 보니까 신기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영화감독이었다. 사실 겹지인 내지 지인의 지인 정도로 분류 가능한 사람이긴 했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되게 뭐랄까, 나는 그를 모르지만 그는 나를 아는, 신기한 상황이었다. 연예인들은 이런 걸 매번 느끼겠구나 싶기도 했다.
금요일엔 할로윈이 있었다. 사실 학교에서 종일 있다가 대충 8시쯤 집에 들어갔기에 뭘 한 건 없었다.
목요일엔 윤가은 감독이 학교에 왔었다. 행사가 끝나고 회식이 있었고 나는 그 회식이 끝나자 학원 회식에 참여했다. 아무래도 보쌈을 이미 먹은 터라 갈비까지 넣기는 힘들었다. 원장 쌤은 내게 많이 먹기를 강조했지만 배가 허용하질 않았다.
회식이 일찍 끝날 거로 기대했지만 어쩌다 보니 우리집까지 오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왔다. 학원 쌤들과 좀 과하게 친해진 것 같긴 한데, 뭐 그래도 재밌었다. 오랜만에 사람이 집에 들어오니 활기가 돋는 느낌이기도 했다. 다 같이 이번에 만든 영화를 보고 갔다.
영화만 틀기는 뭐해서, 과자나 주전부리를 꺼냈다. 그런데 과자는 유통기한이 지났고 코카콜라 또한 유통기한이 지나 있었다. 내가 간식을 너무 안 먹었나.
사실 이 날은 내가 학원 쌤들에게 연기한다는 사실을 들킨 날이었다. 내 인스타를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인스타를 쌤들이 공유하자 곧 내 신상은 쉽게 노출되었다. 네이버에 몇 번 검색하니까 내 필메가 나왔다는 것이다. 영어 쌤은 자기가 <다 이루어질지니>를 좋아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자기한테 말 안 했냐고.
생각보다 주변에 지니를 본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지니를 본 사람 중에 나를 알아본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하다. 포커스가 나에게 맞춰있질 않으니까. 그래서 뭐 얘기하기도 애매하고 먼저 얘기할 거리도 아니고. 무엇보다 학원에선 굳이 밝힐 이유도 없었다.
원장 쌤은 나에게 그랬다. 애들이 쌤보고 똘끼 있다고 하더라고요. 애들 눈이 정확했네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했지만 대충 끼가 있다는 표현 정도로 이해했다. 아님 말고.
생각하니 이러다 내 브런치도 털리는 게 아닐까...
사실 나는 브런치에다 격식이 있는 글을 쓰는 게 아닌 일기를 쓰다 보니 공유할 때 애매해진다. 사실 공유할 이유도 없고. 남의 일기를 왜 보는 거야, 싶기도 하고. 그런데 사실 남의 일기가 재밌다. 나는 여전히 문보영 시인의 시보다 일기가 더 재밌기도 하고.
최근에 재밌는 피드를 봤다. 문문의 비행운에 대한 피드였다. 댓글이 인상 깊었다. 비행운 이후의 앨범 들으면 나도 나락간 기분이라고. 가장 많은 좋아요를 받은 댓글이었다. 나락에 간 기분이 궁금해서 앨범을 오늘 들어봤다. 노래는 참 잘하는데, 인성과 예술을 양립해야만 하는 걸까. 어려웠다. 어느 쪽의 선에서 얘기하기도 편을 들 수도 없었다.
요즘 계속 이메일이 온다. 예비군. 그만 좀 보내지. 안 말해도 간다니까 정말 도배를 한다. 나도 불이익은 받기 싫다고. 사실 너무 귀찮다. 군대 선임한테 이런 얘길 했다. 어떤 정권이 들어와도 예비군은 안 없어지겠죠?
중고거래가 한 동안 뜸했다. 그러다 이번에 나이키 코르테즈도 팔고 맨투맨도 하나 팔았다. 코르테즈는 사실 우먼 사이즈인 줄 모르고 260으로 샀다. 어쩐지 발이 불편하더라 싶었다. 사실 그 전까지 나이키 줌보메로5 블랙을 사고 싶었다. 매장 가서 신어보자 255가 내 발에 딱 맞았다. 내가 260보다 작은 신발을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신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렇게 중고거래를 알아보다 번개장터에 10에 올라온 게 있었다. 그런데 충무로 시상식에 간 날 지인이 그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 별로 안 예쁘네. 마음이 변심해버렸다.
그날 처음으로 내가 신고 있는 닥터마틴이 카벤디쉬라는 시리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단종된 모델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신발도 5년을 신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각하니까 맞았다. 하루가 죽은 것도 5년 되었으니까.
영화 시상식이 작은 규모라고 할지언정 사실 수상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충무로에 떨어졌고 말이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보자 신기했다. 영화인들이 정말 많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영화인일 테니까.
나는 영화인이 되고 싶은 걸까. 사실 이번에 생성형 AI를 이용하고 있자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니었던 것 같았다. 생성형 인공지능을 통해 영상을 만드는 건 내 취향이 아닌 거였다.
이제 겨울이 왔다. 2025년도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대학원 1학년도 끝이 다가온 것이고. 올해 내가 이룬 것은 무엇일까. 이젠 해가 갈수록 점점 성취가 적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