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사고였을 뿐, 어쩔 수가 없다

그냥 일기

by 수호


어느새 10월 24일이 됐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겨울이 실감된다. 수능치는 날이면 패딩을 꺼내는 게 국룰 같았었는데 이젠 아니게 된 것 같다.


유행만큼이나 시간도 빨리 지나간다. 내 골반이 멈추지 않는 탓일까, 라며 중학생 아이들이 릴스를 찍는 걸 봤다. 학원의 아이들에게 틱톡, 릴스, 숏츠는 하나의 커먼즈 같은 느낌이다. 플랫폼의 측면이 아닌 공유되는 영상들만 본다면, 어떠한 저작권적인 문제도 없기 때문이다. 골반이 멈추지 않는 탓일까의 원조는 풍귀라고 한다. 아이들은 풍귀라는 크리에이터를 알고 있었고 그 사람을 따라한다는 패러디 내지 오마주임도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카피레프트의 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대학원 생활을 나름 정신 없이 보낸다고 생각했는데도 불구하고 꽤나 많이 돌아다녔다. 브런치 팝업도 갔다 왔다. 솔직하게 많이 실망했지만 브런치다운 느낌을 잘 냈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나는 대가성 이벤트를 안 좋아한다. 인스타 올려 그럼 상품 줄게, 이건 사실 상품이 아니라 마땅한 교환이니까. 그리고 상품은 마우스패드와 엽서 등이었는데 조촐했다. 그 안에서 글을 쓴다거나 하는 식의 체험형은 잘 꾸민 듯했다. 팝업스토어의 주 목적 중 하나는 체험이고 브랜드 가치는 체험으로 긍정을 빚으니까.


공연도 봤고 영화도 봤다. <변두리 소녀 마리의 자본론>이라는 상상두목 극단의 연극을 봤고 <세게의 주인>, <그저 사고였을 뿐>, <어쩔 수가 없다> 등의 영화를 봤다. 뭔가 되게 신기했던 건 두 거장의 영화 제목을 이으면 되게 예쁜 문장이 하나 탄생한다. 그저 사고였을 뿐, 어쩔 수가 없다.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은 무척이나 섬세했다. 어쩜 저렇게 한결같이 섬세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 보조출연까지도 크레딧에 전부 올려준 감독의 마음은 영화 곳곳에 잘 묻어 있었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는 황금종려상 수상작다웠다. 서사를 끌어가는 힘과 영화의 세계는 점점 커져갔다. 몰입될 수밖에 없는 서사였고 오랜만에 탄탄한 스토리에 몰입되는 영화였다. <어쩔 수가 없다>의 가장 큰 장점은 미장센이었다. 정말 예쁜 샷들이 넘쳤고 만수가 화분을 드는 장면은 정말 지려버린다. 인물의 감정을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놀라웠다. 그외의 자신의 직장을 위해 3명을 죽인다라는 서사의 설정은 가히 상징적이었다. 만수의 페르소나를 3인물에게 나눠졌고 한 명씩 죽인다는 것은 만수가 자신의 본 모습을 찾는다는 설정과 연결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례대로 술을 마시고 일 잘하고 진심인 이성민과 정장을 입고 깔끔한 외형을 유지한 차승원, 야생적인 본능만이 남아 있는 마지막 인물은 각각 만수의 페르소나를 대변하기 좋았다. 그렇기에 차승원의 꾸며진 모습은 실상 뼈대가 없었다. 그렇기에 쉽게 죽일 수 있고 시체 또한 나무처럼 쉽게 묶을 수 있었다.


적다 보니 비평을 하게 되는 것 같은데 나는 그냥 흡수하는 게 좋은 것 같다. 이 영화는 이래서 별로야, 저래서 싫어, 원래 이런 식이기도 했는데 최근 조금 바뀐 것 같다. 어떤 사람이 그랬다. 세상에 나쁜 글은 없다고.


어떤 작가는 내게 고맙다고 했다. 글을 그대로 흡수해줘서, 라고.


오늘은 미용실에 갔다. 예약이 가득했다고 했다. 미용사는 내게 헛걸음을 얘기하며 지나가다 들린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네, 라고 했다. 도서관에 가기 전, 내과에 들리려고 했다. 14시까지 점심시간. 오늘따라 헛걸음을 많이 한다. 편도가 부어서 목이 아프다. 감기일까. 어제 학원생 중 하나는 당당하게 얘기했다. 쌤, 저 감기 걸렸어요.


그러자 한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마스크 다녀야지, 옮기면 어쩌려고.

그러자 당당한 원생은 다시 얘기했다. 감기는 옮겨야지 내가 낫는대.


중2 수업이 끝나고 중1 수업이 시작됐다. 내가 잠깐 교실을 비운 사이 남자아이 둘이 다투고 있었다. 쌤, 얘가 먼저 때렸어요. 아니에요. 다행히 주먹 다툼은 아니고 말싸움 정도였는데, 굉장히 난처했다. 누구 편을 들 수도 없고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알 수도 없었다. 어쨌든 정황상 때린 아이가 있는 것 같았고 그 친구에게 사과를 시켰다. 여전히 사실 잘 모르겠다. 자잘못을 내가 따져도 될까. 그런데 나는 왜 이런 조정까지 해야 할까. 고등학생을 가르칠 때는 이런 부분을 생각도 못했었다. 분쟁이 일어날 수도 없는 구조였다. 우리는 '수업'으로만 이루어진 관계였으니까. 수업이 시작되고 끝이 나면 관계는 끝난다. 성적을 높이기 위한 아이들에게 수업은 집중의 시간이었다. 놓치면 자신만 손해인.


그런데 중학생은 달랐다. 집중시켜야 했다. 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아이들도 설득해야 했다. 그리고 이런 분쟁까지 조정해야 했다. 나는 사실 학원 선생은 강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선생이라는 고유의 의미보다는 강사가 맞는 말 같았다. 그냥 가르치는 사람.


나는 앞으로도 학원에서 이런 일을 또 겪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또 겪어야 될 게 기정 사실일 것이다. 나는 그럴 때면 '그저 사고였을 뿐'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해야 할까. 고등학생 남자 아이 하나는 교통사고가 났다. 그렇게 손목을 다쳤고 수술을 하게 됐다.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그저 사고일 뿐일까?


사고를 당한 아이는 자신이 차에 박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다친 건 자신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차는 사물이고 인간은 비사물이니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17살의 나이에 벌써 수술을 한다는 건 슬픈 일이었다. 한번 다친 곳은 쉽게 다치게 된다. 중학생 때부터 무릎 인대를 다쳤던 고향 친구는 27인 올해에도 여전히 인대를 쉽게 다친다. 좋아하던 축구도 운동에도 제약이 생긴 것이다.


중간고사를 망쳤다고 세상이 무너져내린 것처럼 얘기하는 아이들을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나도 저랬던 때가 있었을 것 같은데. 나는 왜 이 아이들에게 온전히 공감이 안 되는 걸까. 인생에 있어 시험은 사실 매일이라는 걸, 나는 분명 이런 어른이 되기 싫었던 것 같은데.


비관적인 아이였던 나는 여전히 비관적인 어른이 됐다. 학원의 아이들만큼이나 나도 공부하기 싫고 학원에도 오기 싫고 주말에 출근하는 건 더더욱 싫은 사람이다. 수업하기도 싫고 진행하기도 싫다. 근데 진짜 더 싫은 건 어느 순간 아무 의지가 없어졌다. 분명 어릴 때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아이들에게서 나에게 없는 희망과 의지가 보인다. 아이들에겐 분명 기다리는 미래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도 분명 아이들처럼 내일도 남은 2025년도 2026년도 똑같이 존재할 것인데, 나는 왜 아무런 의지가 없을까.


행정 쌤에게 휴대폰으로 전화가 온 적 있다. 그 후 카톡도 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고 나는 카톡을 보다 행정 쌤의 피드를 보게 되었다. 오아시스 공연 보셨구나.


콘서트, 궁금해졌다. 오아시스는 아니지만 최창순의 단콘을 예매했다. 27,000원. 사실 일주일을 넘게 고민했다. 내가 그의 팬일까? 그의 노래를 따라부를 수 있나? 사실 모든 대답에 쉽게 예스를 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도 궁금했다. 콘서트에 가면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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