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생후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의 어느 날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엄마는 그날 나를 안고 어화둥둥 기분 좋게 걸어가다가, 어느 돌과 꽃으로 덮인 장소에서 나를 앉히고는 멀찌감치 떨어져 나를 향해 사진기를 들고 손뼉을 치고 손짓을 하며 웃었다.
그때 나는 내 작은 몸이 돌 위에서 흔들거리는 것을 느꼈고, 무서워서 금방이라도 울고 싶은데 그러면 떨어질 것 같아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엄마가 왜 저기 멀리 떨어져서 있는지 모르겠지만 왜 나를 안아주지 않는지 서럽고 무서웠던 느낌을 기억한다.
기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인지하고 기억과 추억을 구별하게 된 나이가 되었을 때, 드디어 오래된 내 사진첩에서 그날의 나를 발견했다. 돌담과 흐드러진 진달래꽃 속에 앉아있는 나를 찍은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보고서야 나는 내 기억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고 했지만, 엄마는 그 기억은 사진을 보고 만들어 낸 허상일 수도 있다며 믿지 않았다.
나는 내가 천재이거나 특별한 감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타고난 예민한 기질 때문에 별별 것들을 다 기억하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살면서 먼지보다도 하찮은 기억들은 나의 뇌와 마음 어느 곳곳에나 덕지덕지 앉아서, 잠을 자기 직전이나 기억과 비슷한 상황이 닥칠 때, 혹은 스트레스로 인해 머리가 터질 거 같은 순간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와, 나는 복합적인 감정 속에 무수한 불면의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기질들은 내 가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까탈스럽다’, ‘무슨 애가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와 같은 질책으로 엄마에게 등짝을 맞거나 쥐어박히는 일이 반복되자, 나는 내 예민한 촉수를 원망하고 숨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후에는 무뎌지기 위해서 나를 부정하거나 엄격한 시험대에 자신을 세우는 일도 부지기수일 수밖에 없었다. 닥친 상황에서 내게 자연적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오감의 낌새, 사람들의 눈빛과 태도가 변하는 찰나의 타이밍에서 포착되는 눈치, 나를 둘러싼 세계 전체의 움직임을 안다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다.
그런 날 밤에는 불면으로 자신을 괴롭힐 것이 뻔했기 때문에, 점점 눈빛을 흐리게 하고, 부자연스럽게 웃으며 과장된 행동을 하는 등, 기억하지 않고 묻어 버리기 위한 부단한 시도를 했다.
수십 년간의 이러한 ‘억지 훈련’은 장기로 이어지는 나의 기억력을 단기로 수축시켰고, 제대로 상황을 살피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인해 여러 가지 인생의 장면들을 놓치기도 했다.
이렇게 장면과 기억의 수축을 거치며 나름대로 무뎌지는 습관을 지니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예민한 감정의 촉수는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그 결과는 자기혐오와 자기 비난, 완벽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나를 몰아세웠을 뿐, 정작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내 세상에서 나란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흔이 넘은 이제 나는 이 예민한 기질을 받아들인다. 마흔이 되면 조금 더 쓸쓸해지기 때문에 더 자신을 챙기려 노력해야 한다. 날이 서 있는 안테나로 끊임없이 내 감정의 기복을 만들고 자신을 좀처럼 사랑해 줄 수 없는 이 성격을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한다.
의욕과 무기력의 롤러코스터, 시시콜콜한 일들에 행복과 불행을 느끼는 오락가락한 삶에 서서, 흔들리고 부딪히고 무너지고 일어서는 복합적인 감정들을 가진 채, 삶을 소용돌이치게 만드는 기폭 체 그 자체로서의 나이다.
다만, 이렇게 쓰는 일로 자신을 ‘워워’하며 다스리고 진정시킬 수밖에.
‘쓴다’라는 것은 내 마음을 그저 견고하게 바라봐 주는 일이다. 내게 주어진 힘으로 있는 힘껏 나의 삶을 밀어낸다. 글을 쓰는 것으로 인해 내 삶의 방향과 자세를 정할 수 있고 조금의 우울하고 망연자실한 순간도 그럭저럭 메꿔 나갈 수 있게 된다.
글을 쓰는 시간은 예민한 나의 발톱을 굳이 감추지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정성스레 내게 주어진 여백의 공간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다 보면 점차 발톱은 뭉툭해진다.
그러니 두려워 말자. 앞으로 다가올 일들에 내 예민한 촉수가 자신을 침범한다고 해도, 글을 쓰는 것으로 인해 소란스러운 일들을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소박하고 정답고 편안하게 내 영혼과 마주 앉아 배불리 내 삶을 먹는 일, 그것이 ‘쓴다’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