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세계_3화.

이상한 나라의 'H'

by 배운

이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각색된 허구의 글로, 실제 인물 및 사실과는 무관한 내용임을 밝힙니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처음 친해진 친구는 H였다.


H가 중3 때 이미 좋아하던 오빠와 첫 경험을 했다고 내게 고백했던 열여섯 날의 어느 봄날, 나는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인 양 충격을 받고 오열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며 세상 큰 일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던 것이 새삼 민망스럽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H가 나처럼 그 일을 그렇게 큰 잘못으로 여겼더라면 아마 그녀는 지금처럼 살고 있지 못했을 것 같다.


H는 나의 그런 반응에 당황하거나 화낼 법도 한데, (좀 의아한 듯이 잠깐 갸우뚱했던 것도 같지만) 이내 나의 반응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행동했다.


그녀는 정말 그랬다. 나는 그녀의 무신경하면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마치 세상을 유영하는 것과 같았다. 허우적대지 않고 세상의 물결 위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것. 세상의 움직임에 따라가는 것도,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어찌 되든 말든 유유히 제멋대로 움직였다.


H의 집에 처음 놀러 갔을 때, 살집이 뒤룩뒤룩한 고양이가 마당에 나와 있었다.

기르는 고양이냐고 묻자, 기르는 것도 기르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저 집 주변을 어슬렁 거리기에 몇 번 참치 캔이나 음식을 주었더니 가지도 않고 눌러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썩어빠질 년아!, 먹고 죽을 것도 없는데 고양이 년한테 사다 바치냐 이 년아?’


H의 엄마는 H가 고양이에게 음식을 줄 때마다 타박을 놓았지만 정작 고양이를 쫓아내지는 않았다. H엄마의 욕은 늘 하나도 무섭지 않고 우스웠다. H도 엄마가 미친년, 썩을 년이라고 하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았다. 나는 그런 H의 엄마가 좋았다. H는 고등학교 입시 전쟁 속에서도 학원은 한 군데도 다니지 않았고, H의 엄마도 공부하라는 소리는 한 번도 하는 것을 못 봤다. 그녀는 H가 머리 나쁜 년이라고 가끔 욕하시긴 했지만, 또한 쓸모없는 대학에는 굳이 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H는 시험 때가 되면 본인이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했다. 어느 때는 프랑스어에 꽂혀서 열심히 파더니 100점을 맞았고 다른 과목은 0점을 맞아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하고 싶은 것을 했다.

100년 역사의 소위 명문 여고라는 타이틀을 가진 우리 학교에서 그런 모습의 H는 특이했다. 그렇다고 H는 소위 날라리도 아니었고, 말썽을 피우거나 학교를 빼먹거나 해서 선생님의 눈 밖에 나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았지만, 그냥 딱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했다. 어느 때에는 코 바느질에 꽂혀서 가방도 만들고 필통도 만들어서 자기가 만든 것을 들고 다녔다. 또 어느 때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며 몇 달이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H에게는 늘 남자친구가 있었다. 채팅으로도 만나고, 길에서도 만났다. 남자친구와 천일이 다가오자 ABC 초콜릿 사이즈에 딱 맞는 천 개의 미니 박스를 접었다. 졸지에 우리 친구들은 수업시간에 몰래 부업처럼 H를 도와주었는데, H는 우리가 기껏 접어가면 ‘탈락’’패스’를 가려냈다. 우리는 탈락하면 그 미니박스를 조물조물 다시 만드는 수밖에 없었지만, 속도 없이 남의 남자친구 선물을 만드는 게 뭐가 그리 웃겼는지 그냥 종일 키득대며 만들었다.


H는 졸업 후에도 거듭 남자친구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5살 연상의 아저씨같이 푸근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전까지 H의 남자친구들은 대게 이상한 구제 옷을 즐겨 입거나, 몸 이곳저곳에 하나도 멋지지 않은 문신을 덕지덕지 새겨 놓은 사람들이었던 반면, H의 남편은 과묵하고 실제 나이보다 다소 더 들어 보였다.


H의 신혼집에 놀러 간 어느 날, H부부와 나는 대낮부터 셋이서 과실주 열 다섯 병을 마셨다. 나는 그 당시 결혼을 마음먹고 그 집 부모님께 인사까지 드렸던 애인이 있었는데, 마침 그날은 내 애인의 할머님 생신 잔치로 그의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이었다. 그는 내게 몇 번이나 전화해서 당장 달려와 가족들께 인사를 드리라고 했지만, 이미 만취 상태가 되어있던 나는 결국 가지 않았다. 그것을 이유로 그는 내게 이별을 통보했고 나는 '다행히도' 그와 결혼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것은 다 H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후 H는 내리 아이 셋을 낳은 뒤, 일을 그만두었다. 아토피가 심한 첫째를 둘러업고 매일같이 먼 대학병원을 부지런히 오가는 그녀의 모습이 내게는 이상하게 어색하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H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하는 것은, 어느 날 H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적당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녀의 선택에 대하여 합리화를 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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