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코드: 한민족, 그 위대한 생존과 진화의 설계

제1부. 코드(The Code) : 한민족의 몸에 새겨진 생명의 각인

by 현욱

제1장. 땅과 굶주림

모든 생명은 자신이 발 딛고 선 땅을 닮는다. 시베리아의 혹한을 견디는 타이가의 맹수는 두꺼운 피하지방을 축적하도록 진화했고, 아마존의 독사는 주변의 풀잎과 완벽하게 똑같은 보호색을 제 몸에 새겼다. 생명은 환경이라는 거대한 조각칼에 의해 깎이고 다듬어지는 하나의 작품과도 같다. 그렇다면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이고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으로 뒤덮인 이 땅, 한반도는 어떤 작품을 빚어냈을까. 화강암 뼈대 위에 얇게 깔린 산성 토양, 여름이면 모든 것을 쓸어버릴 듯 쏟아지는 변덕스러운 비와 겨울이면 대륙의 냉기를 그대로 품은 채 찾아오는 혹한. 이 혹독하고 까다로운 땅은 자신의 자식들, 즉 한민족의 몸속에 무엇을 새겨 놓았을까? 그 첫 번째 코드는 바로 ‘굶주림’에 대한 처절한 기억이다.

과거의 굶주림과 현재의 폭식

우리의 이야기는 풍요로운 대평원이 아닌, 척박한 산비탈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거대하고 비옥한 강을 끼고 완만한 평야에서 시작된 것과 달리, 한반도는 시작부터 그 조건이 달랐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대신, 고개를 들면 숨이 막히는 산등성이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농사를 지을 땅은 부족했고, 그나마 있는 땅도 화강암이 풍화된 산성 토양이라 지력이 높지 않았다. 여기에 여름의 장마와 태풍, 겨울의 동상해는 한 해의 노력을 너무나도 쉽게 앗아갔다. 우리의 조상들에게 농사란 풍요를 향한 행위라기보다는, 굶주림을 피하기 위한 처절한 사투에 가까웠다.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핍’을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가을의 짧은 풍요가 끝나면, 어김없이 길고 긴 인고의 시간이 찾아왔다. 쌀은 양반들의 차지였고, 대부분의 백성은 잡곡과 나물로 겨울을 버텨냈다. 그리고 마침내 저장해 둔 곡식이 모두 바닥나는 봄이 오면, 지긋지긋한 ‘보릿고개’가 어김없이 시작되었다. 아직 여물지 않은 보리 이삭을 보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해야 했던 굶주림의 시간. 이 끔찍한 춘궁기는 일시적인 재난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땅의 사계절처럼, 수천 년간 해마다 반복되어 온 한민족의 집단적 외상(Trauma)이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리듬이었다.


이 잔인한 리듬은 우리 몸의 가장 깊은 곳, 세포핵 안의 DNA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최신 생명과학인 ‘후성유전학(Epigenetics)’은 이 과정을 놀라울 만큼 명확하게 설명해 준다. 우리의 DNA는 흔히 생명의 설계도라 불리지만, 그 설계도의 모든 부분이 항상 활성화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DNA라는 거대한 도서관에는 수만 권의 책(유전자)이 꽂혀 있고, ‘후성유전학적 조절’이라는 사서가 주변 환경의 요구에 따라 필요한 책을 꺼내어 펼쳐보는 것과 같다.


지속적인 굶주림이라는 환경 신호는 우리 몸의 사서에게 아주 명확한 명령을 내렸다. “비상사태다! 도서관에서 ‘최소 에너지로 최대 효율 내는 법’이라는 책을 찾아라! 그리고 그 책은 항상 펼쳐놓고, 다른 책들은 웬만하면 보지 마라!” 이 명령에 따라 우리 몸은 신진대사의 속도를 늦추고, 음식물이 들어오면 단 한 톨의 영양소도 놓치지 않고 최대한 지방으로 저장하며,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는 유전자들의 스위치를 일제히 켰다. 이것이 바로 저명한 유전학자 제임스 닐이 제창한 ‘절약 유전자 가설(Thrifty Gene Hypothesis)’이다.


절약 유전자는 굶주림의 시대에는 축복과도 같았다. 똑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남들보다 더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저장하는 능력을 가진 개체만이 혹독한 보릿고개를 넘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들은 생존했고, 자손을 남겼다.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이 ‘절약’의 코드는 자연선택을 통해 우리 민족의 유전자 풀에 깊이 각인되었다. 고난의 역사가 우리 몸을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에너지 저장 기계’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수천 년간 생존의 비기였던 이 축복의 코드가, 불과 반세기 만에 풍요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무서운 ‘저주의 족쇄’로 돌변했기 때문이다. 산업화 이후, 우리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칼로리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의 몸은 여전히 굶주림의 시대를 기억하며 절약 유전자의 스위치를 켠 채로 있는데, 밖에서는 하루 세끼의 풍족한 식사는 물론이고 달콤한 음료와 기름진 간식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들어온다.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 풍요 앞에서, 우리의 ‘고효율 에너지 저장 시스템’은 속수무책으로 과부하에 걸리기 시작했다.


서구인들에 비해 비만 인구 비율이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에게 유독 당뇨병과 대사 증후군 발병률이 높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몸은 넘쳐나는 에너지를 처리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절약 유전자는 여전히 “언제 굶주림이 닥칠지 모르니 무조건 저장하라!”고 소리치고, 그 결과 혈액 속의 당은 지방으로 빠르게 축적되어 혈관과 췌장을 병들게 한다. 굶주림을 이겨내기 위해 진화한 몸이, 이제는 풍요 때문에 병들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혈당 수치와 허리둘레에는, 지금도 풀뿌리로 연명해야 했던 우리 조상들의 처절한 기억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이것이 바로 땅과 굶주림이 우리에게 남긴 첫 번째 유산이자, 우리가 풀어야 할 첫 번째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