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코드: 한민족, 그 위대한 생존과 진화의 설계

제2부. 균열 : 압축 성장의 몸살, 대한민국이라는 유기체의 비명

by 현욱

제4장. ‘빨리빨리’의 신경학

우리는 앞서 우리 민족의 몸이 어떻게 척박한 땅과 가혹한 전쟁을 이겨냈는지 목격했다. 굶주림에 대비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비축하고(절약), 위협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반응성),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의 가치를 창조하는(연금술) 능력. 이 세 가지 코드는 분명 우리를 살아남게 한 위대한 생존 엔진이었다. 전후 폐허 위에서 세계가 놀란 압축 성장을 이룩할 때, 이 엔진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대한민국의 발전을 견인했다. 그러나 모든 엔진에는 한계가 있고, 적정 작동 환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비상사태를 위해 만들어진 전투기의 제트 엔진을 24시간 365일 켜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엔진은 과열되고, 부품은 마모되며, 결국 기체는 공중에서 분해될지도 모른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유기체, 그리고 그 안을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의 몸에서 바로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생존 엔진은 여전히 최대 출력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적’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어버렸다. 과거의 적은 북방의 기마 군단이나 굶주림처럼 명확하고, 싸움이 끝나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급성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지금의 적은 스마트폰에서 쉴 새 없이 울리는 업무 알림, SNS 속 타인과의 끝없는 비교,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처럼 형체도 없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만성 스트레스’다.


문제는 우리의 뇌가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상사의 질책 섞인 이메일 한 통에, 우리의 뇌 속 편도체는 국경을 넘어온 적군의 깃발을 본 것처럼 똑같이 비상벨을 울린다. 뇌의 시상하부에서 부신피질까지 이어지는 스트레스 대응 시스템, 이른바 ‘HPA 축(Axis)’은 우리 몸의 ‘중앙 재난 안전 대책 본부’다. 일단 경보가 울리면 이 본부는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전신에 분비하여 모든 자원을 위기 대응에 쏟아붓는다. 문제는 과거에는 몇 시간, 며칠이면 해제되었을 이 비상 대응 체제가, 이제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상시 근무 체제가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만성적으로 높은 코르티솔 수치는 우리 뇌의 구조 자체를 물리적으로 바꾸어 놓는다. 마치 해일이 계속해서 해안선을 깎아내듯, 스트레스 호르몬은 우리 뇌의 가장 중요한 영역들을 서서히 침식시킨다.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곳은 기억과 학습, 그리고 감정 조절의 중추인 ‘해마(Hippocampus)’다. 해마는 스트레스 반응을 억제하는 브레이크 역할도 하는데, 코르티솔은 이 해마의 신경세포를 파괴하고 크기를 줄인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한번 켜진 스트레스 반응은 멈출 줄 모르고 폭주하며 해마를 더욱 손상시키는 끔찍한 악순환이 시작된다. 최근 들어 자꾸만 무언가를 깜빡 잊어버리고, 머릿속이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한 ‘브레인 포그(Brain Fog)’ 현상은 당신의 해마가 보내는 구조 신호일 가능성이 높다.


이성적 판단과 집중력,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뇌의 사령탑 ‘전전두피질(Prefrontal Cortex)’ 역시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과도한 코르티솔은 이 사령탑의 신경 연결망을 약화시켜, 지휘 체계를 무너뜨린다. 예전에는 쉽게 처리하던 일도 버겁게 느껴지고, 사소한 일에도 감정이 폭발하며, 나쁜 습관인 줄 알면서도 담배나 단 음식에 자꾸만 손을 뻗게 되는 것은 당신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다. 스트레스 호르몬의 공격으로 뇌의 사령관이 지휘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반면, 뇌의 공포 센터인 편도체는 코르티솔을 양분 삼아 오히려 더 비대해지고 과민해진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작은 일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세상이 온통 나를 공격하는 위협으로 가득 찬 것처럼 느껴진다. 해마와 전전두피질의 기능은 저하되고, 편도체의 기능은 비정상적으로 항진된 상태. 이것이 바로 ‘번아웃(Burnout)’의 신경학적 실체다.


우리는 번아웃을 흔히 ‘의지가 고갈된 상태’라고 심리적으로만 이해하려 하지만, 진실은 훨씬 더 물리적이다. 번아웃은 장기간의 전투로 지휘관(전전두피질)은 쓰러지고 브레이크(해마)는 파괴되었으며, 경보 장치(편도체)만 미친 듯이 울리고 있는, 통제 불능의 뇌 상태를 의미한다. 압축 성장의 시대에 우리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빨리빨리’라는 생존 코드는, 이제 우리의 뇌를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가장 무서운 균열의 원인이 되었다. 이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닌, 시대가 개인의 뇌에 가한 명백한 상해(傷害)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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