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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건축가 Aug 14. 2022

방에 내리는 비

어릴 적, 방의 창은 무릎 높이쯤에  턱이 있는 큰 이중창이었다.

비 오는 날이면 창을 활짝 열고 창 턱에 걸터앉아 마당에 부딪는 빗소리를 들었다.

세게 내리는 비는 시원한 바람이 묻어 있어 뜨거운 여름날의 천연 에어컨이 되어 주기도 했다.

처마가 깊어 비가 들이칠 염려는 적었다.

옆 자리에 라디오를 두고서 흘러나오는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서면'을 따라 흥얼거리며 비 내리는 마당을 쳐다보던 장면은 내 어린 시절 기억나는 기분 좋은 추억의 한 장면이다.

비 구경을 즐겼던 까닭은 빗소리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특별한 경험을 한 후 생긴 버릇 같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미국에서 살다가 전학 온 친구가 있었다. 같은 동네에 살았고 놀러 갔던 집에는 생전 처음 보는 아타리란 비디오 게임기가 있었다. 

친해질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얄팍한 동기였지만 그 후 단짝이 되었고 뻔질나게 그 집에 드나들게 되었다.

여름방학 때였을까,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날이었다. 

친구 엄마는 외출 중이셨고 잔소리 들을 일도 없겠다 싶어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후드득 빗소리가 들렸다.

밖에 엄청나게 비가 오니 당연히 들리는 빗소리겠거니 했는데, 방 안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똑똑똑 천정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처음엔 한 두 군데서 떨어지던 비가 소나기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내 기억이 부풀린 측면도 있을 것이다)

멍하니 앉아 있는 친구를 재촉해 방안의 집기를 거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아타리 게임기부터였다. 

친구 엄마가 귀가하실 때까지 집기를 옮기고 걸레로 물을 닦고 그릇으로 비를 받았다.

친구 엄마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망연자실했고 집에서 비가 내릴 수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라셨다.

어린애들이 꼬물거려봐야 얼마나 방을 비에서 구했을까. 

그래도 둘이서 애쓴 모양이 기특하셨는지 나중에 맛있는 미국식 스테이크를 만들어주셨던 기억이 있다.

이 날의 경험은 내겐 충격이었다. 

집은 언제까지나 나를 눈비로부터 보호해주고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는 그런 곳이라 여겼는데,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라 여겼는데, 숨을 쉴 수 없는 상황을 맞았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집' 이 절대적으로 안전한 장소는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비가 세게 내리는 날, 방 안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주는 '안정감'이 좋았다.

방 안에서 비 내리는 풍경을 즐겼던 것은 아마도 그런 마음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집이 바뀌고 십 년을 넘도록 빗소리를 듣지 못했다.

나의 십 대와 이십 대는 빗소리의 기억이 거의 없다.

땅에서 멀고 위아래로 남의 집에 끼어 있는 아파트에선 빗소리는 묵음이다. 

비는 집에 내리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내리는 것이었고 선술집에서 소주 마실 때 내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빗소리를 잊고 살다가 다시금 빗소리를 듣게 된 것은 신혼 무렵의 전세방에서였다. 

엘리베이터가 없던 빌라의 4층이었고 침실이 샌드위치 패널로 불법 확장되어 있던 집이었다.

가진 전세금으로 그것도 감지덕지인 상황이라 아내와 난 방을 최대한 아늑하게 꾸며 불법 확장한 잉여의 

공간이 아닌 것처럼 은폐했었다.

신혼의 단꿈이 깨진 건 이사 오고 난 후 만난 첫 소나기 때문이었다.

센 비는 얄팍한 샌드위치 패널을 때려 빗소리를 몇 배로 증폭해주었고 우리의 속삭임은 빗소리에 묻혀버렸다.

코 고는 정도의 소음이 아니라 무너지는 것은 아닐까 싶은 공포의 소리였다.

삼십 대를 맞으며 들은 빗소리는 듣기 싫은 소음이었고 무서움이었다.

아파트에서 살며 잊고 있던 '안전함'의 바람이 다시 솟구치던 때였다.


이 글을 쓰는 지금 2022년 8월, 참혹한 비가 내렸다.

방에서 비가 내리는 정도가 아니라 내리는 비에 빠져 죽을 수 있다는 꿈같은 상황이 사실이 된 것을 모두가 목도했다. 악몽이 현실이 됐다. 

숨 쉬듯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안전한 집'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헛된 죽음을 통해 깨닫는 것은 허망하다.

정부는 '안전'의 결핍을 지하에게 돌렸다. 

못생긴 '지하'에게 못생긴 것이 죄라고 돌팔매 질을 해댔다.

중요한 건 집에서의 '안전'이지 '지하'가 아니다.

얼마든지 안전한 지하 환경은 구축이 가능하다. 안전하게 구축할 수 있는 환경을 돈과 면적의 욕망이 방해한 것이고 정부는 이를 눈감아 준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집에서 '안전'은 중요한 가치다. 

다수의 사람은 집에서의 안전함은 당연한 것이지 집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2022년 8월에 확인했다. 

내가 사는 집에서 익사해 죽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뒤늦은 바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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