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의 건축가 Aug 10. 2023

그리운 술주정


할머니의 장바구니는

늘 반쯤 비어 있었어

매일 보는 장

가득 채울 일이 없었거든

대신에 잔 술을 가득 채우고

연거푸 한잔 두잔

벌게진 얼굴로 딸 집에 얹혀사는

신세타령이 저물도록 이어졌지


축 늘어진 할머니의 젖을 빨면

이슬처럼 맺힌 하얀 방울

잔에 가득 찬 젓을 달라 칭얼대면

설탕 넣어 한 모금 마시게 해 줬어

할미와 내가 그렇게 함께 취해 휘적휘적

붉게 취한 해가

또 우리를 휘적휘적 따라왔지


장마가 길어지면

할머니는 시장에 가지 않았어

쌀만큼 감자를 좋아하던 강원도 우리 할머니

강판에 갈면 비에 녹은 진흙 같았지

한 장을 부치고 한 잔을 마시고

그렇게 한 병을 다 비우시고는

진흙같이 흐믈해진 세월을

서럽다 우셨어

 

오늘도 비가 억수로 오는데

저기 저렇게 감자가 많은데

할머니가 없어

안계신지 오래인데

비가 오고 감자전을 부치면

이렇게 살면 뭐 하나

한탄하던 할머니의 주정이 그리워


#시쓰는건축가 #장소의발견 #두물의날 #할머니의술주정

작가의 이전글 태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