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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 소라게 Aug 21. 2021

당신의 어머니를 대하듯

환자들의 바람

현대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Sir William Osler 가 말하길, "The good physician treats the disease; the great physician treats the patient who has the disease (좋은 의사는 병을 고치지만, 훌륭한 의사는 병에 걸린 환자를 고친다)"라고 했습니다 [1]. 저는 이 가르침을 본받아서 환자를 볼 때는 질병뿐만 아니라, 사람을 보겠다고 늘 다짐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불완전한 사람인지라, 때로는 분주한 시간 속에 병만 고치고 사람은 외면하고 싶은 유혹을 마주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하루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와 그분의 딸로 보이는 아줌마가 하얀색 히잡을 머리에 둘러쓰고 제 진료실로 들어오셨습니다. 아줌마의 손에는 아주 두꺼운 난민 서류를 들려 있었습니다. 영어를 조금 하시는 아줌마로부터 상황을 들어보니, 할머니와 아줌마는 시리아 내전 중 탈출한 난민이셨고, 할머니의 건강을 돌보는 가정의가 저희 병원으로 치과치료를 위해서 보내신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왜 치과에 오셨는지 모르시는 것 같으셨고, 정확히 어떠한 치료가 필요한지는 두꺼운 서류를 뒤져가며 알아내야 했습니다.


가정의가 보낸 소견서에 의하면, 이 할머니는 골다공증이 심하셔서 Bisphosphonate 종류의 약을 처방하려고 하는데, 이 약을 한번 시작하면 뼈가 튼튼해지는 대신 발치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 뼈가 제대로 아물지 않기 때문에, 약물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구강안에 있는 감염의 위험이 있는 치아들을 미리 치료를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검사를 하고 엑스레이를 찍었는데, 충치가 상당히 많으셨고, 어떤 치아들은 이미 곪고 부러져서, 신경치료로도 살릴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환자를 위해 제가 세운 전략은, 이미 썩고 곪은 치아들을 먼저 다 발치하고, 발치한 곳이 아무는 동안 살릴 수 있는 치아들을 고친 후에, 하루빨리 Bisphosphonate 약물을 통해 골다공증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치아를 뽑아야 한다는 말에 놀라시며 무조건 거절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다음 환자를 빨리 봐야 해서 급한 마음에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왜 이 치아들을 살릴 수가 없고 뽑을 수밖에 없는지 시간이 다되어가도록 설명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완강히 발치를 거부하셨고, 저는 서서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할머니가 고집이 이렇게 센지, 막말로 난민의 신분으로 정부에서 치과치료도 다 보조받는 주제에, 의사가 시키면 그런가 보다 하고 따를 것이지, 이분들이 저의 시간과 세금을 낭비하는 것 같다는 나쁜 생각이 들 때쯤, 병만 보지 말고 그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보라는 Sir William Osler의 말이 또 생각났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언어도 잘 안 통하는 낯선 외국 땅에서 갑자기 치아를 뜯어내겠다는 제 말이 무섭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시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리 제 말이 정답이더라도 환자가 치료를 원치 않으면 강요할 수 없기에, 답답한 마음을 추스르고 할머니에게 말씀드렸습니다.


"할머니의 치아는 상태가 안 좋아서 뽑지 않으시면 건강에 아주 해롭습니다. 이 치아들을 방치하시면 나중에 정말 아프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이를 뽑기 싫으신 것도 이해합니다. 저도 갑자기 이를 뽑으라고 하면 두려울 것입니다. 아직 발치를 할 마음에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일단 살릴 수 있는 치아들의 충치치료부터 시작하고, 충치 치료하시는 기간 동안 이를 뽑는 것에 대해서 다시 의논해봅시다".


할머니는 당장 이를 안 뽑아도 된다는 말에, 저의 제안을 수락하셨습니다. 저는 가정의에게 편지로 상황을 설명하며 가능하면 약물치료를 당분간 늦춰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그 후로 충치치료를 성실하게 받으셨지만, 썩어 문드러진 치아일지라도 끝까지 달고 살겠다는 완고한 신념으로 발치를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 예상치도 못하던 COVID19 펜데믹이 시작되었고, 환자를 돌보기 더 어려워진 상황 속에 할머니는 제 기억 속에서 잠시 잊혔습니다.


2020년이 끝날 갈 무렵, 팬데믹 속 응급환자들을 돌보고 있을 때, 할머니와 아줌마께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할머니는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아주 심각한 치통을 호소하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뽑자고 말씀드렸던 치아가 결국에 폭발했는지 할머니는 이를 뽑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하며 아픈 이를 바로 뽑아드렸습니다.


며칠 후 할머니는 또 오셨습니다. 아픈 것은 다 사라졌지만 나머지 나쁜 치아도 뽑아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흔쾌히 나머지 곪은 치아를 다 뽑아드렸고, 드디어 할머니는 골다공증을 위한 약물치료를 시작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사실 아픈 치아한테 고맙습니다. 치통 덕분에 할머니는 그동안 제가 징그럽게 매달리며 이를 뽑게 해 달라는 저의 뜻을 이해하시도록 해줬기 때문입니다.


약물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발치한 곳이 잘 아물었는지 마지막으로 검사하러 오시는 날이었습니다. 진료실을 나가려고 하는데 할머니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큰 가방에서 주섬주섬 액자를 꺼내서 제 손에 꼭 쥐어 주셨습니다. 액자 안에는 저를 닮은 캐릭터와 치아가 그려져 있었고, 아줌마의 편지가 쓰여있었습니다:


Dear Dr. Kim,


Thank you for your care, kindness & professionalism.

You dealt with my mother as if she was your mother.

You were so patient to explain everything to us to understand & take the right decisions.

We really appreciate it all... Thank you... God bless you & your family.


김 선생님,

그동안 친절하게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나의 어머니를 마치 당신의 어머니처럼 대해주셨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이해하고 바른 결정을 내릴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의 축복이 선생님과 선생님 가정에 있기를 바랍니다.


액자를 본 순간 울컥했습니다. 제가 할머니를 저의 어머니로 생각하고 대해드렸기에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할머니를 나의 가족으로 생각하고 도와드렸다면 훨씬 더 잘해드릴 수 있었을 텐데, 할머니의 선물에 감사한 마음보다는 죄송스러운 마음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할머니를 통해서 뒤늦게 깨달은 것이 있다면, 환자들을 나의 가족을 돌보듯이 대하면, 후회는 없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의사의 소임은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고쳐야 한다는 Sir William Osler의 말이 맞았습니다. 제가 만약 처음부터 권위적으로 할머니의 뜻과 반대로 치아들을 뽑아버렸다면, 입안의 병은 금방 치료했겠지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 조국에서 도망 나와 낯선 땅에서 두려움과 맞서며 적응하시려고 노력하시는 할머니의 마음에는 더 깊은 상처를 남겨드렸을지도 모릅니다. 아주 조금의 인내심과 기다림으로 할머니께서는 저를 신뢰하시게 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제가 드리는 모든 말씀을 무조건 따르시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이빨 고치는 치과의사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의 사명은 이를 고치면서 사람도 돌보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진료실로 들어가 환자들을 만나기 전에 조용히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나의 어머니를 대하듯..."


[사진: 할머니께서 주신 액자]


References:

[1] Centor RM. To be a great physician, you must understand the whole story. MedGenMed. 2007 Mar 26;9(1):59. PMID: 17435659; PMCID: PMC1924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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