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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

라디오 속 친구들

by lee nam

이민 초기,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라디오 겸 녹음기를 구입했다. 당시에는 녹음 기능이 있는 라디오가 흔치 않았고, 제법 고가였지만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설렜다. 내 목소리로 구연한 동화를 녹음해 들려주면, 데이비드를 포함한 아이들이 타국에서도 모국어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소중한 도구로 아이들에게 언어와 함께 한국의 정서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느 날, 녹음기를 쓰려고 서랍을 열어보니 녹음기 안에 밥과 반찬, 그리고 물기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 귀하게 아끼던 녹음기가 엉망이 된 것을 보니 화도 나고 실망감도 컸다. 누가 이렇게 했는지 궁금하면서도 다소 짜증이 올라왔다.


화를 가라앉히고 아이들에게 다가가 진실을 말하면 다 용서할 거라며 부드럽게 물었다. “ 누가 녹음기에다 이렇게 했어?”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인 데이비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라디오 속 사람들이 배고플까 봐 내가 밥이랑 반찬이랑 물을 줬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피식 웃음이 나면서도 아이의 순수함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데이비드는 정말로 녹음기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과 똑같이 먹고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아이의 마음속 세계가 얼마나 따뜻하고 순수한지 깨달았다. 녹음기 속 목소리가 배고플까 봐 음식을 챙겨주는 이 작은 마음은 아이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동심의 세계였다. 어른의 시선에서는 미처 헤아리지 못할 그런 감성이 아이에게는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그날 나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어른의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들의 동심 속 작은 행동과 말 하나하나가 오히려 어른인 나에게 새로운 배움과 깨달음을 주고 있었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에는 우리가 놓치고 지나가는 따스함과 배려가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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