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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화롯불, 추억의 불꽃

by lee nam

깊은 산골 마을의 겨울은 유난히 깊었다. 바람은 구멍난 창호지 문틈으로 스며들어 앙상한 나무들 사이를 울렸고, 창문에 맺힌 성에를 지우면 희뿌연 들녘이 내다보였다. 그런 겨울, 우리 집의 중심은 언제나 화롯불이었다. 거기에는 단순히 불꽃의 온기만이 아니라, 가족의 이야기가 타오르고 추억이 피어올랐다.


화로에 숯을 담고 부채질을 시작하면 붉은 불씨가 서서히 살아났다. 아버지의 손길은 마치 작은 생명을 돌보듯 정성스러웠다. 이내 숯불이 뜨겁게 달아오르면, 방 안은 금세 훈훈해졌다. 화로 위엔 늘 밤이 올려져 있었고, 나무젓가락으로 밤을 굴릴 때마다 껍질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단순히 밤 익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다림의 소리였고, 함께하는 기쁨의 소리였다.


화롯불 주위엔 언제나 사람들이 모였다. 어머니는 뜨거운 불에 손을 내밀며 옛날 이야기를 풀어놓으셨고, 아버지는 그 옆에서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우리는 그 곁에 앉아 발을 녹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화롯불 위에 올려진 작은 보리차 주전자의 물이 끓어오르면, 방 안은 뜨거운 차의 향기로 가득 찼다. 그때 마셨던 구수한 보리차 한 잔이 어찌나 따뜻했던지, 지금도 그 맛은 겨울의 정취와 함께 떠오른다.


가끔은 화롯불이 튀어 이불에 작은 구멍을 내곤 했다. 어머니는 “불조심해야 한다”며 잔소리를 하셨지만, 화롯불 없이는 이 겨울을 버틸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셨다. 어머니의 무릎에 누워 화롯불을 바라보고 있으면, 타닥타닥 타는 소리와 함께 마음이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그때의 불빛은 단순히 방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정을 밝혀주는 등불이었다.


이제는 화롯불 대신 보일러가 겨울을 채운다. 따뜻하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하다. 화롯불 주위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 수다, 그리고 밤 익는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추억은 내 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나를 데워 주는 마음의 화롯불로 말이다.


가끔 겨울밤이 너무 길고 적막할 때, 나는 그 시절의 화롯불을 떠올린다. 빨갛게 달아오른 숯불, 그 앞에서 어깨를 마주했던 가족들, 그리고 따뜻했던 시간들. 화롯불은 단지 난방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는 중심이었고, 내 삶의 한 자락을 부드럽게 데워 주는 기억의 불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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