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해가 기울어질 무렵 산책길에 올랐다. 길은 조용했고, 바람은 나지막한 속삭임처럼 내 옆을 스쳐갔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추었다. 눈앞에 펼쳐진 들판에서 바람은 풀잎을 어루만지며 춤을 추고,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며 낮고 깊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바람 속에서 세월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젊은 날엔 나도 바람처럼 거칠고 빠르게만 흘렀다. 세상은 늘 바쁘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만이 삶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바람은 내게 달리기만 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바람은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돌아가고, 때로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지나가는 법을 보여주었다.
ㅠ들판 한가운데 서서 바람을 맞았다. 내 나이만큼이나 늙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나무는 한 자리에 서서 계절을 받아들여왔다. 봄에 새싹을 틔우고, 여름에는 무성한 그늘을 주며, 가을엔 낙엽을 떨구고, 겨울엔 빈 가지를 하늘에 펼쳐 보였다. 그 나무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매 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자연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맡길 뿐이었다.
ㅍ내가 그동안 놓치고 살아온 것은 이런 느림이 아니었을까. 바람이 나무와 풀잎, 그리고 땅을 스치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내 안에 남아 있는 조급함, 욕망, 그리고 두려움은 모두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것들을 움켜쥐려 애쓸 필요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다. 자연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바람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오래된 나무는 그 자리에서 늘 그랬던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자연은 아무 말 없이도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바람의 흐름, 나무의 묵묵함, 풀잎의 흔들림은 모두 삶의 비밀을 품고 있다.
이제 나는 바람을 믿기로 했다. 세상도, 시간도, 내가 품고 있는 걱정도 모두 흘러갈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도 자연처럼 흘러가는 존재임을. 바람이 가르쳐준 성숙은 서두르지 않고,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