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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삶을 천천히 더 깊이 이해하다

by lee nam

늙어간다는 것, 천천히 이해해 가는 과정거울 속의 나는 어느새 달라져 있다. 주름은 하나둘 늘어났고, 머리칼은 희끗희끗 빛을 잃었다. 예전에는 없던 통증이 몸의 여기저기에서 신호를 보내고, 한때 익숙했던 일들이 이제는 낯설게 느껴진다. 나이가 든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하루하루 조금씩 몸은 약해지고, 사회 속에서 내가 차지하던 자리도 점점 작아지는 듯하다. 누군가는 이 과정을 퇴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점점 깨닫는다. 늙어간다는 것은 결코 단순히 뒤로 물러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삶을 천천히, 더 깊이 이해해 가는 과정이다.


젊은 날의 나는 언제나 바빴다. 어딘가로 달려가야 했고, 누구보다 앞서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성취와 인정이 삶의 중심이었고, 무엇을 더 이루느냐가 나를 증명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 속도가 조금씩 느려졌다. 욕심내던 것들이 어느덧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고, 쫓던 것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것이 초조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초라하게만 보였으니까. 하지만 천천히 알게 되었다. 그 느려진 시간은 내게 숨을 고를 여유를 주었고,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바라볼 기회를 열어 주었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성취로 증명하지 않는다. 이제는 더 적게 이루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대신 나는 내가 누구인지,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는다. 오래된 앨범 속에서 젊은 날의 사진을 꺼내 보고, 한때 스쳐 갔던 추억들을 다시 들여다보기도 한다. 나의 과거는 더 이상 후회나 미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살아온 흔적이고, 내가 나이 들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모든 흔적들을 품으며 새로운 나를 배우고 있다.


늙어가는 것은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고, 무대에서 내려오는 시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려오는 순간에도 할 일이 있다. 관객이 되어서 남은 삶을 깊이 바라보는 것. 사람들을 이해하고, 세상을 더 넓게 느끼는 일이다. 젊은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들판에 핀 작은 들꽃,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젊은 부모의 미소, 아무 말 없이도 손을 잡아주는 오래된 친구의 온기. 이런 사소한 것들에서 마음이 충만해진다.


물론, 늙어가는 일에는 분명 아쉬움이 따른다.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내게 새로운 자유를 주었다. 더 이상 좇지 않아도,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나는 내가 가진 것들로 충분하다는 것을 안다. 오히려 나를 둘러싼 세상을 더 따뜻하게 바라보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늙어간다는 것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작이다. 더디게 걷는 내 발걸음은 세상과 나를 이해하는 속도로 변했다. 그 속도 속에서 나는 내 안의 깊은 목소리를 듣고, 주변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주름진 얼굴과 느려진 걸음도 이제는 나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늙어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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