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갈 무렵, 어머니가 고추를 따던 모습이 떠오른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날이면 어머니는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고추밭으로 향하곤 하셨다. 작은 키에 몸을 낮추고 앉아 땅 가까이 매달린 빨간 고추를 하나하나 살피며 손수 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수확은 언제나 느릿했지만, 그 속엔 정성과 세월의 무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고추를 따는 어머니의 손길은 마치 세월의 흐름처럼 느리고 깊었다. 주름이 진 손등과 굵어진 손가락으로, 가시가 찔려도 개의치 않고 고추 줄기에서 단단히 익은 빨간 고추를 떼어내시곤 했다. 이따금 숨을 고르듯 잠시 그늘 아래 앉아 마른 입술을 축이며 쉬는 모습도, 이 가을 풍경 속에 조용히 녹아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고추를 따는 동안, 머리 위의 가을 하늘은 파랗게 빛나고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함께 고추 향이 은은하게 공기 속에 퍼져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들이 나부끼며 땅으로 내려앉는 모습은, 마치 어머니와 가을이 나누는 대화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는 잔잔한 그 시간 속에서 묵묵히 고추를 모았고, 가끔씩 돌아보며 나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 주셨다.
모든 고추를 따고 난 후, 어머니는 고추를 볕 좋은 곳에 널어놓으셨다. 며칠이 지나면 붉은 고추들은 검붉게 말라가며, 어머니의 손길이 남긴 가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들었다. 그 모습이 고운 기억으로 남아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는 이제 내 곁에 안 계시지만, 고추를 널어놓던 그 붉은 빛깔은 가을마다 떠오르는 사랑스러운 기억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