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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

고추 따는 어머니

by lee nam

가을이 깊어갈 무렵, 어머니가 고추를 따던 모습이 떠오른다. 햇살이 부드럽게 내리쬐는 날이면 어머니는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고추밭으로 향하곤 하셨다. 작은 키에 몸을 낮추고 앉아 땅 가까이 매달린 빨간 고추를 하나하나 살피며 손수 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수확은 언제나 느릿했지만, 그 속엔 정성과 세월의 무게가 가득 담겨 있었다.


고추를 따는 어머니의 손길은 마치 세월의 흐름처럼 느리고 깊었다. 주름이 진 손등과 굵어진 손가락으로, 가시가 찔려도 개의치 않고 고추 줄기에서 단단히 익은 빨간 고추를 떼어내시곤 했다. 이따금 숨을 고르듯 잠시 그늘 아래 앉아 마른 입술을 축이며 쉬는 모습도, 이 가을 풍경 속에 조용히 녹아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고추를 따는 동안, 머리 위의 가을 하늘은 파랗게 빛나고 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함께 고추 향이 은은하게 공기 속에 퍼져갔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낙엽들이 나부끼며 땅으로 내려앉는 모습은, 마치 어머니와 가을이 나누는 대화처럼 느껴졌다. 어머니는 잔잔한 그 시간 속에서 묵묵히 고추를 모았고, 가끔씩 돌아보며 나를 향해 따뜻하게 웃어 주셨다.


모든 고추를 따고 난 후, 어머니는 고추를 볕 좋은 곳에 널어놓으셨다. 며칠이 지나면 붉은 고추들은 검붉게 말라가며, 어머니의 손길이 남긴 가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들었다. 그 모습이 고운 기억으로 남아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는 이제 내 곁에 안 계시지만, 고추를 널어놓던 그 붉은 빛깔은 가을마다 떠오르는 사랑스러운 기억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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