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은 조용히 찾아와 삶의 결을 바꿔 놓는다. 몇 마디 말로 끝날 줄 알았던 진료실에서 “대장암입니다”라는 말이 떨어지던 그 순간, 내 세상은 낯선 어둠으로 뒤덮였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 병은 우리를 하나의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다.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은 깨지고, 새로운 감각이 열렸다.
수술대 위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마치 거대한 바위 아래 깔린 듯한 무게를 느꼈다. 얕은 숨을 쉴 때마다 상처는 나를 선명하게 찔렀고, 고통은 내 안에서 낯선 언어로 말을 걸어왔다. 그 언어는 강렬했고, 끊임없이 나를 흔들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표현처럼, 열에 들뜬 밤이면 나는 죽음의 골짜기를 넘나들었다. 깊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느낌,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속삭임. 그 속삭임은 때로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장가였고, 때로는 내 삶의 끝자락에서 나를 부르는 낯선 목소리였다.
병실의 창문 밖, 작은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삶의 연약함을 느꼈다.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병원의 적막을 가르며 흐를 때, 나는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느꼈다. 그 무게 속에서, 내 몸은 낯선 이방인이 되어갔다. 내가 알던 나 자신이 아니라, 질병이 새겨 넣은 또 다른 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낯선 경험 속에서 삶의 본질을 마주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것처럼, 왜 질병은 문학의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사랑처럼 강렬하고, 전쟁처럼 치열하며, 질투처럼 내면을 흔든다. 질병은 단순히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삶의 이면을 드러낸다.
작은 걸음을 떼는 것도 두려웠던 회복의 날들. “이제 다 나으셨습니다.”라는 의사의 말은 천국의 문턱에서 들려오는 신의 음성처럼 다가왔다. 그 말은 단순한 진단을 넘어서, 다시 살아가라는 허락이자 축복이었다.
건강을 되찾은 지금, 병의 기억은 바래져 가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완치되어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 가끔씩 불현듯 찾아오는 통증이나 병원 복도에서 맡았던 소독약 냄새에 대한 기억들은 여전히 나를 그 시간으로 되돌린다. 그러나 그 기억은 두려움이 아닌, 나를 강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건강한 나에 대해 감사하고 감격하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
질병이 남긴 흔적은 상처일 뿐 아니라, 새로운 시선이다. 그 시선은 일상의 소소함을 소중하게 바라보게 하고, 사랑하는 이들의 손길을 더 따뜻하게 느끼게 한다. 나는 이제 안다. 고통은 우리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더 깊이 살아가도록 이끈다는 것을.
버지니아 울프가 질병의 깊이를 문학의 언어로 풀어냈듯, 나도 나만의 언어로 고통을 기록해 둔다. 그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닌, 삶을 더 단단히 붙잡게 해주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