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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날려 보내야 할 것들

by lee nam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나 가볍다. 그 바람에 겨가 흩날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에서 쓸모를 다한 겨는 바람 한 줄기에도 쉽게 떠밀려 사라진다. 그 모습은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만, 어쩐지 내 마음 한구석에 오래도록 남는다.


겨는 쌀을 둘러싸고 있던 껍질이다. 한때는 쌀을 보호하며 그 본질을 감췄지만, 정작 쌀의 알맹이가 드러나는 순간 자신은 쓸모를 다하고 떨어져 나간다. 바람에 나는 겨를 보며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삶에도 이런 ‘겨’는 없을까? 내가 소중히 여기던 무언가가, 사실은 단지 겉을 감싸고 있던 껍질에 불과하지는 않았는지.


살아가며 우리는 쓸모없는 것들까지 움켜쥐곤 한다. 남들의 시선이나 가식적인 욕망이 마치 나를 보호하는 갑옷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갑옷이 과연 나를 지켜주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짓누르고 있는 짐인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바람이 불 때 겨가 떠나가듯, 우리에게도 필요 없는 것들은 가벼운 바람에 흩어져야 한다.


겨의 가벼움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겨는 자신의 역할을 다한 뒤 바람에 몸을 맡긴다. 그것은 받아들임이다. 더는 필요하지 않음을 깨닫고 스스로 흩어질 줄 아는 지혜다. 우리는 종종 무언가를 놓는 것을 두려워한다. 잡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것이 실패나 후퇴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겨는 바람에 날리며 비로소 자연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나는 바람에 나는 겨를 보며 생각한다. 더 가벼워질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비울 수 있다면 내 삶도 바람을 타고 흩날릴 수 있지 않을까. 쓸모를 다한 껍질을 떨쳐 내고, 그 자리에는 나다운 알맹이가 남을 것이다.


바람은 불고, 겨는 날아간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내 삶에서 날려 보내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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