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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뒤뚱거리다 다시 일어선 삶

by lee nam

미국에 온 지 딱 십 년 되던 해였다. 남편이 운영하던 세탁소가 무너졌다.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당시 낯선 땅에서의 삶은 늘 예측 불가였고, 하루하루가 도전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남편은 가족을 위해 과감히 사업에 도전했다. 작은 가게였지만, 그 안엔 우리의 희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이 넷을 키우며, 생계를 함께 책임졌고,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교육에 힘쓰고, 남편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누어지고자 애썼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무리였던 걸까. 버텨오던 사업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암처럼 무서운 현실이었고, 그 위기 앞에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어야 했다.


그 시기, 아이들은 너무도 어렸다. 막내는 유치원에 다니고, 큰아이는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 네 아이들이 모두 저마다의 손을 내밀고 있는 그 시점에, 가장이었던 남편이 좌절을 겪었다. 우리는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울고, 다시 함께 길을 찾기로 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었으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남편과 나는 연방 공무원 시험을 함께 준비하게 되었다. 낮엔 일하고, 밤엔 책상 앞에 앉아 공부했다. 아이들 옆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가끔 아이의 숨소리에 위로받기도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우리는 함께 합격했고, 각자의 부서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우리 부부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서기 시작했다.


공무원 생활의 시작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밤에 일했고, 남편은 낮에 일했다. 서로의 얼굴을 온전히 보는 날이 손에 꼽혔고, 메모로 하루의 소식을 전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오늘 셋째가 숙제를 안 했어요.” “막내가 엄마 보고 울었어요.” 부엌 식탁 위의 짧은 쪽지들은 우리 부부의 대화였고, 협업의 도구였다. 지치고 외로울 때도 많았지만, 나만 고단한 게 아니란 걸 알기에, 나보다 더 애쓰는 남편을 알기에, 다시 힘을 냈다. 부부가 함께 삶의 풍랑을 지나가는 일이란, 손을 놓지 않고 가는 것이라는 걸 그때 절실히 깨달았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아이들은 제법 자라 대학을 가고, 사회인이 되어 우리 곁을 하나둘 떠났다. 집 안은 어느새 조용해졌고, 우리 부부는 이제 같은 시간대에 출근하고 퇴근한다. 아침 식탁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나눌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매일 감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교대로 밤낮을 오가며 살아야 했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여유와 평화. 때론 그 시간이 너무도 소중해 말없이 마주 앉아 커피 잔을 부딪히는 것으로 하루의 마음을 전하기도 한다.


이번 4월이면 미국 생활 39년. 그중 10년은 넘어지고 흔들리고, 정말이 뒤뚱거리며 살아낸 시간이었다. 그러나 남은 29년 동안은 그 부서졌던 시간을 정직하게 채워오며 살아왔다. 우리는 여전히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히 일하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를 향한 믿음 하나로 버텨왔다. 부부라는 이름, 그것은 결국 둘이 함께 짊어진 삶의 무게를 나누고 견디는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 모든 시간을 통해 배웠다. 오늘도 그 배움을 품고, 우리는 다시 하루를 살아간다. 넘어져 뒤뚱거리면 서다 다시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 힘차게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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