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해남 윤 씨 고산 윤선도 가문의 여식으로, 옛 양반가의 전통을 품고 깊은 산골로 시집을 오셨다. 소박한 삶을 택하신 어머니는 늘 단정히 집안을 꾸리고 자녀 교육에 정성을 기울이셨다. 어머니가 처음 시집오실 무렵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맨발이나 짚신을 신고 다녔기에, 그 모습이 낯설고도 생경하게 느껴졌다고 하셨다. 그러던 중 까만 고무신이 나오고, 신발 문화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곧이어 장터엔 화사한 색감에 반짝이는 꽃무늬 고무신이 등장했고, 아이들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나 역시 그 꽃신을 보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우리가 살던 마을에서는 닷새마다 능주 오일장이 열렸다. 장날이면 어머니 손을 잡고 이십 리 길을 걸어 장터로 향했다. 그날도 “꽃신 사세요, 싸게 팔아요”라는 외침에 이끌려 사람들이 트럭 옆으로 몰려들었다. 꽃신들은 대개 짝이 맞지 않거나 무늬가 벗겨진 흠 있는 제품들이었다. 아마 제대로 된 짝은 도시의 백화점이나 시장으로 납품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그런 흠은 중요하지 않았다. 짝짝이라도 꽃신은 꽃신이었다. 다홍색과 분홍색이 섞이고, 나비 무늬와 국화 무늬가 어우러진 짝짝이 꽃신을 들고 돌아오는 길은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뻤다. 소중히 아껴두었다가 학교 가는 날이나 외출 때만 꺼내 신었고, 마치 보물처럼 여기며 다루었다.
내 친구 옥남이는 동네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집 딸로, 언제나 새것을 먼저 갖는 아이였다. 하루는 누구보다 먼저 짝짝이 꽃신을 신고 학교에 왔다. 반 아이들의 시선은 그녀의 발에 집중되었고, 그날 하루 옥남이는 단연코 주인공이었다. 체육 시간, 우리는 같은 편이었다. 덧치볼을 하다 우연히 내가 옥남이의 꽃신을 밟고 말았다. 꽃무늬가 찢기고 고무가 터져버린 신발을 들고 옥남이는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 아이들은 조용히 바라보기만 했고, 그날 수업은 내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옥남이는 찢어진 꽃신을 들고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저녁 식사 때면 아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셨다. 우리 형제들은 그날 하루에 일어난 일을 나름대로 신나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옥남이의 꽃신이 찢어진 날은 달랐다. 그날 저녁은 여느 때와 달리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밥을 먹었다 어머니가 조심스레 물으셨다. 나는 머뭇거리며 낮의 일을 말씀드렸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신 어머니는 며칠 뒤 다시 장에 다녀오시고는, 조심스럽게 꽃신 한 짝을 내게 내미셨다. 무늬는 달랐지만 크기와 색이 비슷한 짝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시며 웃으시는 어머니의 눈빛에서 따뜻함이 전해졌다. 나는 그 꽃신을 들고 옥남이 집으로 달려갔다. 새로 짝지어진 꽃신을 받은 옥남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해맑게 웃었다. 비록 어설픈 짝이었지만, 아이의 마음을 달래기엔 충분한 선물이었다.
이따금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짝짝이 꽃신은 내 유년의 상징이자 인생의 은유처럼 다가온다. 완벽하게 맞는 짝은 세상에 드물고, 무늬는 달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짜 짝 아닐까.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 친구의 눈물, 장터의 북적임, 그리고 내 미안한 마음까지 모두 그 꽃신 한 켤레에 담겨 있다. 사람은 살아가며 때로 작은 일에도 서로에게 마음을 다치게 하기도 하지만, 찢어진 마음도 정성으로 꿰매면 다시 짝이 될 수 있다. 다소 다른 무늬의 짝짝이 꽃신이 오히려 더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시간이 가르쳐준 너그러움일 것이다. 이 세상에 꼭 똑같은 짝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