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의 내 기억 속에는 늘 한 마리 어미소가 있다. 이름은 없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면 고요히 꼬리를 흔들고,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던 갈색의 그 소는 마치 내 오랜 친구요 가족 같았다. 우리 집은 시골에서도 꽤 외진 마을에 있었다. 산자락 아래 커다란 기와집과 마당에는 수많은 꽃들이 자라는 정원과 돼지우리와 닭장 그리고 외양간이 있는 집이었다.. 그 당시 소는 우리 집의 귀한 재산이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를 자식처럼 아끼셨다. 아침이면 아버지는 소에게 여물을 주시고, 낮이면 밭을 갈게 하고, 해 질 녘이면 소를 끌고 와 외양간에 매 두고 소죽을 끓여 먹이셨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봄에, 우리 집 어미소가 송아지를 낳았다. 어머니는 마당에 짚을 깔고 이부자리처럼 펴 놓았고, 나는 숨을 죽이며 해산을 지켜보았다. 송아지는 축축한 몸으로 비틀거리며 일어서려 했고, 어미소는 조용히 송아지를 핥으며 자애로운 눈빛으로 감싸 안았다. 나는 그 모습에서 무언의 사랑, 무조건적인 헌신을 보았다. 그것은 언어보다 깊은 울림이었고, 어린 내 마음에도 어떤 숭고함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 송아지는 내 동무가 되었고, 나는 마치 작은 목동처럼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이면 송아지를 끌고 냇가로 나갔다. 짙은 녹음 아래, 송아지는 발을 담그며 물장난을 쳤다. 나는 꽈리를 불며 그 옆을 지켰다. 산과 들판, 냇가와 논두렁이 모두 우리의 놀이터였다. 때때로 비가 오면 송아지와 함께 짚단 아래 숨어 비를 피했다. 그러다 가을이 오면 송아지는 제법 자라 있었다. 그러나 진짜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장면은, 어미소와 송아지가 함께 들에 나가던 날이었다. 외양간 문이 열리기 무섭게 송아지는 제 세상을 만난 듯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송아지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풀밭과 나뭇가지에 코를 들이밀었다. 어미소는 그런 송아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음매, 음매’ 하고 울었다. 그 울음소리는 마치 “엄마 곁에서 너무 멀리 가지 마라”는 따뜻한 부름처럼 들렸다. 송아지는 금세 어미소 곁으로 되돌아와 몸을 비비며 안기곤 했다. 그 순간들 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진실한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로 소 장수가 찾아왔다. 아버지 어머니는 송아지를 팔기로 하셨다. 우리 집 형편상, 그 선택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소리 없이 울며 송아지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미소는 묶인 채로 애처롭게 울었다. 송아지도 그 소리에 대답하듯 울부짖었다. 소장수가 가져온 수레에송아지가 실렸다. 수레바퀴가 덜컹거리며 마당을 떠날 때, 송아지의 눈에 맺힌 슬픔이 내 가슴에 박혔다. 그날 이후, 어미소는 한동안 먹을 것도 잘 먹지 않았고, 마당은 텅 빈 듯 적막했다. 그 침묵이 나를 더 크게 자라게 했다.
이민 와서의 삶은 말할 수 없이 바빴다. 낮과 밤이 바뀌는 교대 근무 속에서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부엌 불을 켜고 아이들의 먹을 것을 챙기는 것이 일과였다. 그런 우리에게 기쁨과 힘을 주는 건 네 아이들이었다. 유난히 엄마 아빠를 따르고 좋아했던 아이들. 늘 잘해주지도 못하고 부족함이 많았던 우리를 믿어주고 서로 아끼는 모습에 마음이 뭉클했다. 네 아이들 덕분에 우리는 외롭고 험한 이민 생활을 넉넉히 견딜 수 있었다. 이제는 저마다 타주로 떠나 본인의 가정을 꾸리고, 또 다른 엄마 아빠로 살아가고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때때로 전화를 걸어오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문득 어미소와 송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나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만은 늘 내 곁에서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듯하다. 동물이나 사람이나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천륜인 것이다.
이제 나는 고향을 떠나 수십 년의 세월을 돌고 돌아왔다. 미국에 와서 다른 문화 속에 살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어미소와 송아지가 산다. 세월은 모든 것을 흘려보내지만, 유년의 감격과 사랑은 내 안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그때의 기억은 내가 부모로서 살아가는 힘이 되었고, 자식을 품에 안고 지켜보는 눈길에 깊이를 더해주었다. 언젠가 내 자식들 그리고 그 자식의 자식들도 이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작은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며 조용히 기도하면서 마음을 열고 기다린다. 송아지를 그리는 어미소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