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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say2

늦깎이 작가의 노래

by lee nam

지난 39년의 이민 생활은 켜켜이 쌓인 시간의 더미와 같다. 젊은 날 품었던 꿈들은 현실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희미해져 갔고, 어느덧 나는 꿈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익숙한 무력감 속에 살아왔다. 교단에 서서 아이들에게 지식을 나누어주던, 밤새워 책장을 넘기며 문학의 향기에 취하곤 했던 젊은 날의 나는 이제 희미한 기억 속 파편처럼 남아있다. 네 아이를 키우며 쉴 새 없이 달려온 시간 속에서, 밤에는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에 매달리고 낮에는 한국학교 교사와 주일학교 봉사자, 전도팀 리더라는 여러 개의 역할을 감당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읽고 쓸 여유는 사치처럼 느껴졌고, 그렇게 좋아하는 문학은 점점 멀어져 갔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마치 멈춰버린 시계와 같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늘 무언가를 갈망했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잊고 살아야만 했다.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못했고, 간절히 원했으나 애써 외면해야 했던 시간들이 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긴 침묵의 시간을 지나, 문득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조용히 피어올랐다. 마치 오랫동안 잠자던 씨앗이 따스한 햇살과 촉촉한 물기를 만나 움을 틔우듯, 잊었던 꿈들이 희미하게나마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서툰 솜씨로 조심스럽게 연필을 쥐고 흰 종이 위에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행위는, 마치 오랫동안 굳어있던 손가락으로 낯선 건반을 더듬거리듯 더디고 어색하기만 하다. 문장 하나를 완성하는 데에도 긴 시간이 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온전한 글로 옮기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어색하고 더딘 과정 속에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나의 일부를 다시 만나는 듯한 벅찬 감동이 밀려온다. 과거의 능숙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지만, 지금의 서툴고 느린 글 속에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과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삶의 풍파를 겪으며 얻은 연륜과 깊어진 사유는 어쩌면 예전보다 더욱 진솔하고 따뜻한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이제 나는 늦깎이 연주자와 같은 마음으로 글을 쓴다. 화려한 기교나 빠른 속도를 쫓기보다는, 진솔한 마음과 삶의 진정한 숨결을 담아내는 것에 집중한다. 젊은 날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인생의 섬세한 결들을 문장 하나하나에 조심스럽게 새겨 넣고, 오랫동안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들을 천천히, 그리고 솔직하게 펼쳐 보인다. 때로는 서툰 표현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 꾸밈없는 진심이 오히려 더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쌓아온 내면의 이야기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진정성이 담긴 나만의 독특한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오랜 침묵 끝에 다시 울려 퍼지는 악기의 소리처럼, 나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파동을 일으킬 수 있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상처와 아픔, 그리고 오랜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나의 이야기는 어쩌면 투박하고 거칠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는 굴곡진 삶을 묵묵히 걸어온 한 인간의 진솔한 고백과, 늦게나마 다시 꿈을 향해 나아가려는 용기가 담겨있다. 침묵 속에서 더욱 깊어진 생각들과, 고난을 통해 단단해진 내면의 힘은 어쩌면 이전보다 더 깊고 풍부한 울림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연주는 아닐지라도, 진심을 담아 연주하는 늦깎이의 느린 곡조가 오히려 듣는 이의 마음을 더욱 깊이 울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나는 여전히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속에 있다. 잊었던 꿈을 다시 붙잡고, 서툰 솜씨로 한 줄 한 줄 글을 써 내려가는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이자 희망이다. 내 인생의 악보 위에 어떤 선율이 그려질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늦게 시작된 이 느린 연주가 언젠가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마음속에도 잔잔한 위로와 따뜻한 공감으로 스며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오늘도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들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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